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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von 뮤즈 · 2026-03-11

“그러니까… 취미가, 뭐라고 하셨죠?”

카페 조명은 괜히 예쁘게만 밝았고, 내 마음만 어두웠다. 남자가 두 번째로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아, 네. 취미는… 잠자는 거요.”

내가 대답하자 남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래, 또 망했다.

이름 윤지윤, 스물일곱. 스펙은 중간, 외모는 중간, 인생도 중간. 다만 재수 없이 기가 세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기가 센 게 아니라 피곤해서 그래, 이 사람들아…’

남자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컵을 들었다.

“지윤 씨는… 일은 뭐 하신다고 하셨죠?”

“병원 행정부요. 대학병원. 환자 기록 정리하고, 데이터 관리하고… 그런 거.”

“와, 병원… 힘들지 않아요?”

“힘들죠. 그래서 취미가 잠자는 거예요.”

남자가 또 웃다가 말문이 막혔다. 대화를 이어 가려는 노력은 가상했지만, 이미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카페 한쪽 TV에서 뉴스가 작게 흘러나왔다.

“이른바 ‘이상 변이’ 사례가 또 보고되었습니다. 외형의 급격한 변화, 호르몬 수치의 비정상적 변동, 기억 혼란이 동반되는…”

남자가 TV를 힐끗 보고 코웃음을 쳤다.

“저거, 또 시작이네. 요즘 유튜브발 괴담들 진짜 많다니까요. 사람이 하루아침에 딴 얼굴이 된다느니, 성별이 바뀐다느니… 말이 돼요?”

“…그렇죠. 설마요.”

나는 형식적으로 웃었지만,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목을 쓸었다. 거기엔 희미한 주사 자국 자국이 하나 남아 있었다.

‘성별이 바뀐다… 하긴, 말이 안 되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그랬다. 이날 밤 이런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소개팅은 예의 바른 종료 멘트와 함께 깔끔하게 끝났다.

“네, 오늘 즐거웠어요.”

“네, 저도요. 잘 들어가세요.”

둘 다 눈 하나 안 웃고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봄 밤 공기가 차게 스며들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 모퉁이에, 새로 생긴 클리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루멘 바이오 클리닉 – 호르몬 밸런스 & 체형 관리 센터〉

첫 상담 무료

“호르몬 밸런스…?”

무심코 중얼거리자, 자동문이 ‘칙’ 하고 열렸다.

“어서 오세요.”

안에서 흰 가운을 입은 여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또 다른 소개팅 자리에 끌려온 기분으로, 괜히 한 발 안으로 들여놓았다.

“아, 그냥 간판만 보고…”

“상담은 무료예요. 요즘 20~30대 여성분들 호르몬 불균형이 정말 많거든요. 피로감, 불면, 체중 변동, 생리 불순…”

“…다 있네요, 저.”

내가 중얼거리자, 여의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이 표현이 좀 이상하게 들렸지만, 이미 나는 푸석한 내 얼굴과 다크서클을 떠올리고 있었다.

“검사는… 뭐, 간단해요?”

“네. 혈액 채취 조금이랑, 간단한 스캔. 병원보다는 훨씬 덜 번거로워요. 대신 결과는 저희 쪽 데이터베이스에서만 관리되는 형태라…”

“보험은요?”

“보험은 안 돼요. 하지만 첫 시술까지는 이벤트가 있어서요.”

시술이라는 말에 잠깐 걸렸지만, 여의사의 말은 유려했다.

“호르몬 밸런스를 맞춰주는 조정제예요. 요즘 인기 많아요. 피로감 줄고, 피부 탄력 좋아지고, 체형 라인도 정돈되는 효과가 있어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떠올랐다. 파운데이션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피로, 야근, 각종 눈치싸움의 흔적들.

‘…그래, 조금은 나아져도 되지 않나.’

“통증은… 심해요?”

“주사 한 대 맞는 정도죠. 단, 맞고 나서 하루 이틀은 몸이 좀 피곤할 수 있어요.”

나는 결국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이름, 생년월일, 주소, 직업. 그리고 맨 아래, 작은 글씨. 실험적 치료에 대해 설명을 충분히 듣고 이해하였으며, 동의합니다.

“…실험적?”

“아, 그건 문구상 표현이에요. 너무 걱정 마세요. 이미 1,000명 이상 시술 받으셨고 부작용 사례는 거의 없어요.”

의사의 미소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나는 멍한 상태로 허리를 드러내고 시술용 침대에 엎드렸다.

“조금 따가울 거예요. 참을만하니까 걱정 마세요.”

차가운 알코올 냄새 뒤로, 살을 찌르는 느낌이 훅 들어왔다. 주사액이 척추 근처로 스며드는 감각이 묘하게 따뜻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등골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 번쩍 지나갔다.

“으…!”

“괜찮으세요? 처음엔 다 그렇게 놀라세요.”

숨이 목에서 걸렸다 풀렸다. 눈앞이 하얘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오늘은 무리하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 내일부터 서서히 컨디션이 달라지는 게 느껴지실 거예요.”

나는 비틀거리며 클리닉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 동안, 등 쪽에서 아직도 뭔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계단 아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윤지윤.”

나는 고개를 들었다.

203호, 옆집 남자. 이름은 강지후.

흰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한 손엔 편의점 봉지. 동네사람+어릴적 동네친구+가끔 내 택배 대신 받아주는 인간.

“뭐야, 얼굴 왜 이렇게 상했냐. 소개팅 또 망했냐?”

“…모르면 말을 하지 말든가.”

“표정이 말해주고 있는데?”

지후는 웃으며 다가와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가까이서 보니, 눈 밑에 다크서클이 물감처럼 번져 있겠지.

“어디 아파? 얼굴 더 하얘졌네.”

“주사 맞았어.”

“또? 무슨 주사?”

“호르몬… 밸런스? 뭐 그런 거…”

내가 애매하게 대답하자 지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디서?”

“새로 생긴… 루멘 바이오 클리닉?”

“…거기, 이름 처음 듣는데. 야, 아무 데서나 맞지 말랬지? 네 몸은 네가 하나밖에 없…”

“창피하게 잔소리 좀 하지 마. 나도 생각이란 게 있어.”

지후가 한숨을 내쉬며 봉지를 흔들었다.

“라면 먹을래? 오늘 새로 나온 떡라면이래.”

“안 땡겨. 그냥 자고 싶어.”

정말로, 눈꺼풀이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웠다. 계단 한 칸 한 칸이 산처럼 높게 느껴졌다.

“컨디션 되게 안 좋아 보이는데… 쓰러지지 말고, 알겠지?”

“네, 아빠.”

대꾸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귀 안쪽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 삐끗, 세상이 약간 기울어진 느낌.

“어, 잠깐…”

“야, 괜찮아?”

지후의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등골 위쪽에서부터 전율이 치솟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땀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나… 좀… 어지러…”

말을 마치기 전에, 계단과 천장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까맣게 꺼졌다.

‘삐~, 삐~.’

규칙적인 기계음이 귓속을 찔렀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병원?’

겨우 눈을 떴을 때, 흰 천장이 먼저 보였다. 소독약 냄새, 침대 시트의 까슬한 감촉.

“어? 깼다.”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려다, 목덜미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으…”

“천천히.”

지후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난간에 손을 짚었다. 눈 아래 다크서클은 이제 지후에게 가 있었다.

“여긴… 어디야.”

“응급실. 네가 계단에서 그대로 쓰러졌어. 정신없어서 내가 119 불렀지. 기억 안 나?”

“조금…”

목소리가 내 귀에 다르게 들렸다. 분명히 내가 말했는데… 톤이 반 음에서 한 음은 낮게 깔린 느낌.

‘…기분 탓이겠지.’

“당직 의사가 그러는데, 특이한 수치가 좀 보이긴 하지만 일단은 집에 가서 지켜보래. 내일은 정밀 검사 받으러 오고.”

지후가 물컵을 건네줬다. 손을 뻗어 컵을 잡는데, 손등의 혈관이 조금 더 도드라져 보였다.

“…손 크기가 원래 이렇게 컸나.”

“뭐라고?”

“아니야.”

병원에서 간단한 퇴원 설명을 듣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근육이 안쪽에서 뻐근하게 당기는 느낌이 섞여 있었다.

“오늘은 진짜 혼자 두기 좀 그런데…”

“괜찮아. 나 이제 샤워하고 바로 잘 거야.”

“전화 잘 받아. 이상하면 바로 카톡 말고 전화.”

“알았어, 아빠 두 번째.”

집 문을 닫고 들어오는 순간, 어지럼증이 다시 한 번 스쳤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침대까지 거의 기어서 들어갔다. 옷도 제대로 못 갈아입고, 그냥 쓰러지듯 누웠다.

몸 안쪽에서 뭔가가 재배열되는 것 같은 기분이 이상하게 생생했다.

심장이 두근, 두근,

리듬이 바뀌는 듯한 감각.

‘내일… 병원… 다시…’

의식은 그 마지막 생각 위에서 곤두박질치듯 꺼졌다.

아침이 아닌, 낮이었다. 창문 틈으로 강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몇 시야…’

핸드폰을 더듬어 찾다가, 손끝에 닿은 기계의 촉감이 이상하게 작게 느껴졌다.

화면을 켜자,

오전 11시 42분.

“미쳤네…”

잠긴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분명히 말은 평소처럼 했는데, 귀에 들린 목소리는 남자였다.

“잠깐만.”

침대에서 반 쯤 몸을 일으키려다, 이불이 훌쩍 내려갔다.

“…”

가슴이, 평소보다 훨씬 평평했다. 묵직해야 할 부분이 사라지고, 대신 어깨와 가슴 근육 쪽에 낯선 단단함이 느껴졌다.

“에이, 설마…”

꿈이겠지. 아직 안 깼겠지.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현관 옆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는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눈매는 내가 알던 그것보다 조금 더 날카로웠다. 코는 조금 더 높고, 턱선은 분명히 더 각져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틀림없이 윤지윤의 눈이었다.

“………”

입을 열었다.

“야.”

낮은 중저음이 나왔다.

“설마…”

조심스럽게 더 길게 말을 해봤다.

“나는… 윤지윤…입니다?”

거울 속 남자가, 같은 말과 같은 억양으로 씨익 웃었다. 전기가 척추를 타고 올랐다.

“이게… 뭐야.”

손을 뻗어 볼을 꼬집었다. 아프다. 피부가 뜨겁고,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핸드폰이 그때 울렸다.

발신자: 강지후.

“…받기 싫은데.”

하지만 지금 나를 본 사람이 필요했다. 이게 꿈인지, 미친 건지, 아니면 정말… 뉴스에서 떠들던 **‘이상 변이’**인 건지. 전화를 받자마자, 지후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야, 너 괜찮냐? 왜 카톡도 안 보고......”

“지후야.”

내 목소리가 지후의 말을 잘랐다. 잠깐의 침묵.

“…누구세요?”

당연했다. 이 목소리를 듣고, 이 얼굴을 보면 누구도 나를 윤지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거울 속 낯선 남자와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나야.”

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윤지윤.”

전화기 너머의 침묵은, 이번에는 훨씬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