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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von 뮤즈 · 2026-04-02

지후가 이유 없이 화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화나려고 애쓰는 느낌.

지후: …아무것도 아냐.

지후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지후: 그냥… 좀 신경 쓰여서.

나: 왜 신경써?

지후: 몰라. 그냥…

대답이 이상하게 짧았다. 의미 없이 짧은데, 그 안에 분명 어떤 감정이 있었다.

지후: 너 먼저 씻어.

지후: 어제도 못 씻었잖아.

나는 욕실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멈췄다.

나: …지후야.

지후: 응?

나: 나… 남자로 샤워는 처음이야.

지후: 뭐??

나: 그냥… 갑자기 마음이 이상해서. 몸이… 남자니까. 내 손도 그렇고…

나는 손등을 바라봤다. 살갗 아래 굵어진 힘줄과 예전보다 다부져진 손목.

나: 내 몸인데… 내 몸 아닌 것 같은 느낌… 씻는 것도 무서워.

지후는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지후: 괜찮아.

그는 문틈을 잡고 말했다.

지후: 너는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지윤이니까.

말하는 사람은 지후인데, 왜 나는 숨이 막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천천히 목을 끄덕였다.

나: 조금만… 문 앞에 있어 줘.

지후: 그래. 여기 있을게.

문을 닫으며 그가 가까이에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익숙한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남자의 몸인데 여자의 마음으로 남자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슬프고…

그런데 어딘가 따뜻했다.

샤워 후

머리를 말리며 나오는데 지후가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지후: 상태 어때?

나: …괜찮아. 몸은 멀쩡해.

지후는 내 머리카락 끝을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지후: 머리… 이렇게 젖은 채로 있지 마.

그리고 수건을 받아 내 머리카락을 직접 말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 심장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나: 지후야…

지후: 응.

나: 너… 왜 이렇게 다정해?

지후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지후: …몰라. 그냥… 너니까?

그 말은 촛불 조명 아래에서 너무 가까웠다. 너무 솔직했고, 너무 위험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심장은, 남자의 몸 안에서 두근두근 울렸다. 그 박동이 귀 뒤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숨이 점점 뜨거워졌다

.

잠시 후, 우리는 여전히 같은 방 안에 있었다. 각자가 씻고 나온 터라 싸구려 샴푸냄새를 서로게에 풍기면서.

좁은 공간.

침대 하나.

소파 하나.

조명이 낮게 깔린 채, 정적만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적을 뚫듯 옆방에서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남녀가 웃다가, 낮게 숨을 섞고, 이어서 반복 적으로 들리는 침대 프레임 소리.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얼굴이 뜨겁게 데워지는 게 느껴졌다. 자꾸 귀가 달아올랐다.

지후도 고개를 돌리더니 순간적으로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지후: …하.

그리고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지후: 맥주… 하나 사올게.

지후: 기다려.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져 있었다.

나: ……응.

내 대답도 내 목이 아닌 것처럼 낮았다.

문이 닫히고, 그가 나간 뒤 방은 더 조용해졌다.

침대,

조명,

그리고 남자 된 나.

나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이상해지지.

남자이고 싶은 것도 아닌데. 여자였던 감정은 그대로인데. 몸이 바뀌었다고 해서 마음이 바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진 않는데, 그런데 지후가 가까이 있으면 마음이 흔들렸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지금이 더. 내 마음이 여자인 건 변함없는데 지후에게 느껴지는 건 왜 이렇게 다르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후였다. 비닐봉지에 맥주 두 캔. 그는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문을 닫는 손끝이 살짝 떨린 걸 나는 봤다.

나: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최대한 평범하게 물었다.

지후: 계산대에… 사람 많더라.

거짓말이었다. 이 근처에 사람 없다. 지후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지후가 내 옆에 앉았다. 맥주캔을 건네주려다가 살짝 내 손가락과 닿았다. 그 순간 둘 다 동시에 멈칫했다. 불꽃이 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뜨겁지.

지후가 먼저 손을 뺐다. 그의 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지후: 지윤아.

나: …응?

지후: 너가 아무리 남자가 되어도 이 속은 지윤이야. 난 언제나 널 지윤이 그대로 상대할 거야.

나: 응, 근데 그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야?

지후가 어색한 웃음을 웃으며 매주 한 캔을 들었다.

지후: …그냥.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나: 응.

그 말이 너무 다정해서 더 아팠다.

캔을 따자 톡, 하고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더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는 긴장.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은 떨림.

남자와 남자.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자였고, 지후의 마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말해버리면 돌아갈 수 없는 걸 알았으니까.

밤은 그렇게 서로의 숨결을 조금씩 스치며 서서히 깊어지고 있었다.

*** *** ***

클리닉 로비는 오후 햇빛을 받아 밝고 따뜻해 보였다. 하지만 나의 뒷덜미는 서늘했다. 저번처럼 붐비는 로비를 피해 뒷 문을 통해 클리닉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라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정라은: 지윤 씨. 오셨어요? 들어와요.

흰 가운 아래로 떨어지는 매끄러운 실루엣. 조용한 미소. 따뜻한 목소리. 지후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온기였다.

나는 침을 삼켰다. 가슴이 조금 조여왔다. 진료실 문이 닫히자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정라은: 오늘은 좀 어때요?

정라은: 라은이 먼저 물었다.

나: 조금… 어색해요. 몸이.

정라은: 그럴 수밖에요. 지금 지윤 씨는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기묘한 균형을 잡고 있어요.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고.

라은은 내 팔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고 혈압기를 감싸며 말했다.

정라은: 근데… 제가 지윤 씨 상태를 조금 더 정확히 보려면 ‘솔직함’이 필요해요.

나: 솔직함이요?

정라은: 마음도요.

나는 순간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남자의 가슴 안에서 울렸다. 라은은 청진기를 들고 내 목덜미 근처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머리카락 사이로 스치는 그녀의 숨결이 너무 가깝고 따뜻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라은: 심박수… 조금 빨라요.

라은이 속삭였다.

나: 아… 밖에서 빨리 걸어와서요.

정라은: 그런 걸로는 안 이런데.

부드럽게 웃으며 눈을 마주쳤다.

정라은: 괜찮아요. 긴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청진기가 가슴 위에 놓였다. 차갑고, 너무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들었다 놓았다 할 때마다 온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나… 지금 왜 이러지.

나는 남자다. 아니, 몸은 남자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여자다. 그리고 여자의 손길은… 이렇게 느껴져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라은은 태블릿을 넘기며 말했다.

정라은: 지윤 씨, 제가 요 며칠 여러 경로로 조사를 좀 했어요.

나: 조사요?

정라은: 음.

반말도 아니고 존댓말도 아닌 미묘한 대답. 그녀는 태블릿 화면을 돌려보였다. 특정 제약사의 로고. 이상하게 익숙한 문구. 노트 형식의 메모들.

정라은: 제약회사가 하려던 짓은 중독성 있는 피부관리 킷 이었던 것 같아요. 눈에 띠는 변화를 위해 함부로 호르몬 제재를 사용했던 거지요.

거기 까지 말하고 시선을 노트북에서 나로 향했다.

정라은: 그렇다고 지윤씨같이 성변이가 일어나는 사례는 의학적으로는 ‘불가능’이에요. 아무리 여러 가지 경우를 대입해보고 사례를 찾아봐도 전무한 일이예요.

난 약간 울먹였다.

나: 그, 그러면 난...

정라은: 네, 지윤씨를 다시 예전의 지윤씨로 돌리는 건 불가능해요.

나: 남자로 살아야 한다는 건가요?

라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라은: 지금 호르몬 수치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안정화 되고 있어요. 완벽한 남성이에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그녀가 보기에 이미 내 눈 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을 것이다.

걱정, 동정, 그리고… 묘한 호의.

그녀의 눈빛에서 내가 느낀 것이다.

진료가 끝나고 라은이 말했다.

정라은: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나: 네?

정라은: 밥 같이 먹어요 지윤 씨 혼자 두기 싫어서 그래요.

그 말이 자꾸 위험한 방향으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