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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요정이 되다?

von 뮤즈 · 2026-03-11

어둠 속에서 하얀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포근함. 마치 구름 위에 누워 있는 기분?

설아: …으으… 여기가 어디야… 천국인가…….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간신히 눈을 뜨자,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뿌옇게 번져 보였다.

소독약 냄새. 삑삑거리는 기계음.

병원.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설아: …살았네.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려 손을 들었다.

그런데.

'……?'

손이 너무 가볍다.

아니, 가볍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마치 중력이 반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원래 내 팔뚝은 터질 듯한 근육으로 웬만한 꿀벅지 못지않은 두께를 자랑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힘없이 흔들리는 저건… 그냥 나무젓가락이다.

설아: 뭐지… 왜 내 팔이… 어디 기아 체험하다 온 멸치가 됐냐…?

등골이 서늘해져 이불을 걷어찼다.

팔이 이 꼴이면 하체는 보나 마나다.

억, 하고 숨이 턱 막혔다.

내 튼실하던 다리는 어디 가고 웬 뼈다귀 두 개가 놓여 있다.

환자복 바짓단을 홱 걷어 올렸다.

지나치게 매끈하다. 창백할 정도로 하얗다. 심지어 털 한 올 없다.

내 야성미 넘치던 다리털은 다 어디로 증발한 거야? 누가 자는 사이에 왁싱이라도 했어?

아니, 그것보다 이 앙상한 뼈대는 뭐냐고!

이건 사람 다리가 아니라 쇼윈도 마네킹 다리 떼어다 붙인 거잖아!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꽥 소리를 지르려 입을 벌렸다.

설아: ……에?!

삑사리.

목소리가 높다. 높아도 너무 높다.

내 목소리는 원래 지하 3층 암반수에서 울려 퍼지는 동굴 저음인데.

지금 나온 소리는?

설아: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으아아아?!

이건 거의 헬륨 가스 마신 꾀꼬리 소리다.

애니메이션 여주인공 더빙 톤이라고!

혼자서 멘탈이 붕괴되어 '아아' 거리고 있는데, 드르륵.

커튼이 조심스레 열렸다.

이모: 설아… 깨어났어?

중년의 여성.

곱슬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딱 봐도 오래 아이를 돌봐 온 티가 나는 아주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들어왔다.

그 뒤에는 덩치 큰 '맨 인 블랙' 스타일의 아저씨가 묵묵히 서 있었다.

딱 봐도 경호원이다.

아주머니가 다가와 내 앙상한 손을 덥석 잡았다.

이모: 아이고, 우리 아가… 다행이야… 하느님이 도우셨어… 살아났네…….

…아가?

나 서른여섯인데? 수염 난 아저씨한테 아가?

그런데 이분의 표정과 말투, 묘하게 낯이 익다.

옛날 보육원 시절, 나 챙겨주던 선생님 느낌이다.

설아: 저기… 누구…?

이모: 그래, 우리 설아야.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그러게 꼭 최 실장이랑 같이 다니라 했잖아. 길에 쓰러져서 심장이 멈췄다고 했을 때… 이모 심장도 멈추는 줄 알았다.

심장? 멈췄다고?

잠깐,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그때 뒤에 있던 경호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 실장: 아버지랑 어머니는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으셔서… 일단 우리가 먼저 왔다. 이따 들르실 거야.

나는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다.

자식이 죽다 살아났는데, 부모는 비즈니스 때문에 안 왔다?

이모랑 경호원만 보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오버랩됐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 칙칙한 보육원 천장.

그리고 지금, 이 '백설아'라는 아이도…….

'…이 집구석도 콩가루네. 부모 복 없는 건 나랑 똑같냐.'

왠지 모를 짠함이 가슴 한구석에서 밀려왔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 상황 정리가 필요하다.

대화 내용을 보니 백 회장은 아버지일 거고, 사모님은 엄마일 거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 아이의 이름은 '백설아'가 된다. 백설(白雪)이라, 이름 한번 생긴 거랑 찰떡이네.

내 옆에 있는 이 아주머니는 본인을 이모라 했으니 '이모'로 호칭 정리.

그리고 저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경호원은, 아까 이모가 말한 걸 토대로 보면 '최 실장'일 것이다.

좋아, 대충 파악 완료.

……아니, 잠깐만.

지금 남의 집 족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럼 나는? 김철수는?

내 197cm, 150kg의 육체는 어디 갔는데?

내 빨래판 복근은? 내 스쿼트 200kg 기록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미친 듯이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불안 + 초조 + 대환장 파티.

나는 본능적으로 내 손등을 다시 봤다.

핏줄이 비칠 듯 투명하고 하얀 손. 손가락은 길고 가늘어서, 딱밤 한 대만 때려도 부러질 것 같다.

이게 내 손이면… 나 어디 갔냐고!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렸다.

[긴급 퀘스트 : 본인 얼굴을 확인하시오.]

입이 뇌보다 먼저 반응했다.

설아: …저… 그… 거울 좀 있을까요?

이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모: 거울? 갑자기 왜 그러니, 설아야? 얼굴 다친 데는 없는데?

'이모, 다친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제가 공포 영화 찍고 있거든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설아: 그… 그냥… 보고 싶어서요… 제 상태가…….

최대한 불쌍한 척 연기했다.

그러자 최 실장이 벽장을 뒤져 손거울 하나를 꺼내주었다.

최 실장: 여기.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받아 들었다.

제발. 제발 꿈이어라. 꿈이면 깨서 로또 산다.

천천히 거울을 들어 올렸다.

설아: …….

거울 속에 비친 건, 김철수가 아니었다.

수염 자국 난 험상궂은 아저씨는 온데간데없고.

눈처럼 하얀 피부. 사슴 같은 눈망울. 툭 치면 쓰러질 듯한 가녀린 턱선.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

내가 심폐소생술을 하던, 바로 그 소녀였다.

'……미친. 존예인데?'

아니, 감탄할 때가 아니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설아: 잠깐… 이게 뭐… 야….

목소리도 여자. 표정도 여자. 몸도 여자.

심지어 이 아이는… 분명히 아까 숨이 멎었었는데?

내 영혼은 지금 링 위에서 백덤블링을 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야!!! 나 어디 갔냐고!!! 내 몸 내놔!!!

본능적으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설아: …아이, 씨-발?

그런데. 그 찰진 욕설조차 너무나도 청아하고 귀여운 꾀꼬리 목소리로 출력되었다.

[시스템 : 욕설의 타격감이 -100 감소했습니다.]

'아… 망했다…….'

나, 김철수.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헤비급 챔피언.

오늘부로 [병약 미소녀(Lv.1)]로 전직해버렸다.

최 실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최 실장: …목소리가… 좀… 거칠어진 것 같기도 하고…?

'헉.' 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눈치채지 마라, 제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 "제가 사실은 빙의한 아저씨인데요"라고 하면 정신병원 직행이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

드라마나 영화, 아니면 요즘 애들이 환장한다는 웹소설에나 나오는 흔해 빠진 클리셰.

소위 말하는 '영혼 체인지'나 '빙의' 같은 거 말이다.

'말도 안 돼. 그런 건 모니터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잖아.'

이건 21세기 대한민국 현실이다. 마법이 난무하는 판타지 세상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성별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었다고?

도저히 납득이 안 되지만, 꼬집힌 볼따구의 통각은 지독하게 생생했다.

그리고 이 순간, 현실 부정보다 더 끔찍한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잠깐. 만약 그 뻔한 클리셰대로 내가 여기 들어온 거라면… 내 원래 몸뚱이는 어디에 있지?'

설마… 내 몸에 이 비실비실한 소녀가 들어간 건 아니겠지?

상상해봤다.

근육질 거구의 몸으로 "꺄악! 이게 뭐야!" 하고 굵은 목소리로 비명 지르는 김철수(내용물: 백설아).

'……끔찍하다.'

심장이 다시 뛰고 있다는 기쁨보다, 내 몸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근손실 포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하느님. 이건 밸런스 패치가 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아무튼 일단 내 몸, 진짜 김철수의 몸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설아: 저… 저기요. 그날… 저를… 구해준… 그분은… 어떻게 됐어요?

아, 미치겠네. 정말 이렇게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온다고?

질문 내용보다 내 목소리에 먼저 소름이 돋는데, 이모의 동작이 딱 멈췄다.

그녀의 눈가에 금세 물기가 차올랐다.

이모: …설아야. 그분은… 이미…….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모: 돌아가셨어. 그 자리에서 바로.

이모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명확하게 팩트를 꽂았다.

이모: 너 대신… 너를 살리려고 했던 그분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머릿속 회로가 '탁'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잠깐. 잠깐만, 타임.

나…… 죽은 거라고?

벼락이 떨어졌을 때, 난 이미 게임 오버였다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 이건…

이 뽀샤시한 소녀의 몸 안에 들어온 게 진짜 '나'고. 원래의 김철수는……

영혼 가출한 빈 껍데기, 폐기 처분 대상이라는 건가?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말도 안 돼. 절대 인정 못 해.

나는 그 몸으로 30년을 넘게 살아왔다.

누구에게도 잘생겼다, 귀엽다 소리는커녕 "인상 좀 펴라" 소리나 듣던 투박한 몸뚱이였지만.

그래도… 그게 '나'였다고.

아침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쑤셔대던 그 몸. 입만 열면 걸걸하게 터져 나오던 내 목소리. 좁은 신발 속에서 굳은살이 박이다 못해 돌처럼 변해버린 내 발.

그리고… 평생을 맞고, 때리고, 버티던 이 주먹까지.

쪽팔린 것도 많고, 이불 킥 할 흑역사도 많았지만.

그 모든 게 다 합쳐져서 '김철수'라는 캐릭터였는데…….

그걸 이렇게 한순간에 서버 종료 당했다고?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돌아갈 방법도 없이, 이 쪼끄만 몸에 갇혀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니.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끔찍한 미래가 목을 조여 왔다.

멘탈이 나갈락 말락 하는데, 이모가 조심스레 결정타를 날렸다.

이모: 이 병원 지하 장례식장에 계셔… 격투기 선수셨대. 이름이 김철수라고 하더라.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김. 철. 수.

그 이름 세 글자가 뇌리에 '쿵' 하고 박혔다.

그래. 그게… 죽어버린 '나'의 이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미련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폼 나는 인생도 아니었으니까.

맨날 쌈박질에 스폰서 하나 없는 선수 생활, 남은 건 낡은 상가 건물 하나와 곰팡이 핀 옥탑방뿐.

행복? 개나 주라지.

좀 구린 인생이긴 했어.

하지만, 아무리 개판인 인생이라도 이렇게 허무하게 엔딩 크레딧을 올려도 되는 거냐고.

작별 인사도 없이?

가슴 한구석이 구겨진 신문지처럼 찌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상황은 시트콤인데, 웃음은 1도 안 나왔다.

내 장례식이다.

아무리 이 몸이 소녀의 것이고, 내가 지금 어떤 꼴이 되었든.

그래도 가봐야 한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나는 여기 갇혀 있지만, 내 몸뚱이라도 제대로 배웅해 줘야지.

그건 지금 이 기막힌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니까.

나는 가냘픈 손을 꽉 쥐었다.

설아: …가야겠어요. 장례식장.

이모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이모: 안 돼, 설아야! 너 아직 회복도 덜 됐고… 그런 데 가는 거 아니야!

설아: 나… 꼭 가야 돼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나 부드럽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의도치 않은 [필살기 : 동정심 유발]이었다.

설아: …그분이… 날 살리셨잖아요.

내 말에 이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술을 꽉 깨물더니,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 …그래. 알았어. 네 마음이 그렇다면… 대신 내가 함께 갈게.

장례식장에 가려면 우선 이 환자복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이모는 그냥 입고 가도 된다 했지만 그건 아니다. 내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환자복은 쫌 아니다.

외출복이 어디 있냐 물었더니 캐비닛을 가리킨다.

병실 한쪽, 설아의 전용 캐비닛.

호텔급 병실에 전담 이모, 문밖엔 경호원까지. 딱 봐도 이 집안, 클래스가 다르다.

확인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어라?'

처음엔 세상이 핑 도는가 싶더니, 몸이 너무 가벼워서 적응이 안 된다. 무슨 종이 인형이 된 기분?

살짝 휘청했더니 이모가 기겁하며 달려온다.

이모: 설아야! 위험하게 왜 일어나. 내가 해줄게, 넌 누워 있어.

아뇨, 그게 아니라요.

지금 난 이 '설아'라는 캐릭터에 대한 정보가 0이라고요.

인벤토리에 뭐가 있는지, 장비 확인은 직접 해야 할 거 아냐.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 캐비닛 문을 열었다.

그리고.

탁.

0.5초 만에 다시 닫았다.

……뭐지, 저건?

레이스. 프릴. 리본. 또 리본. 거기에 눈이 멀 것 같은 올 화이트.

이 집 부모님은 딸을 무슨 천사 코스프레 시키는 취미가 있나?

내 멘탈이 바사삭 부서지려는데 이모가 물었다.

이모: 설아야, 장례식이면… 검은 원피스를 준비할까? 아니면 그냥 교복 입을래?

설아: 원피스……?

순간 뇌정지가 왔다.

장례식 = 검은 옷. 국룰인 건 아는데. 저 '샤랄라'한 원피스를 입으라고? 이 속에 30대 아저씨가 들어 있는데?

절대 안 되지.

아니, 잠깐. 나 지금 고등학생이잖아. 치트키가 있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덤덤한 척 내뱉었다.

설아: …교복 입으면 되죠.

이모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모: 그래? 괜찮겠어? 아직 회복도 덜 됐는데… 교복은 불편하잖아.

설아: 네. 교복이면… 충분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얇은 블라우스에… 치마……?

하. 김철수 인생 2회차. 시작부터 난이도 '헬'이다.

이모는 묘하게 감격한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이모: …그래. 우리 설아도 이제 학교 갈 생각이 조금은 생겼나 보네. 다행이다, 정말.

나는 입꼬리만 대충 올려서 애매하게 웃어주었다.

속으로는 딴생각이 가득했다.

'학교 갈 생각? 그게 왜 다행인데?'

이 반응을 보아하니, 이 몸의 주인인 '설아'라는 애. 학교생활이 영 순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예쁘장하게 생겨서 왕따였나? 아니면 성격 파탄 일진이라 정학이라도 당했었나?

뭐, 전자든 후자든 지금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난 학교에 갈 생각이 1도 없으니까.

내 목적지는 단 하나. 내 육체가 누워 있는, 내 장례식장뿐이다.

이모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캐비닛에서 옷을 꺼내 침대 위에 하나둘 펼쳐놓기 시작했다.

새하얀 실크 블라우스. 고급스러움이 흐르는 베이지 체크 스커트. 올 하나 나간 곳 없는 얇은 니트 조끼. 거기에 먼지 한 톨 없는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까지.

설아: ……와.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딱 봐도 견적이 나온다. 이건 그냥 교복이 아니다.

[아이템 : 재벌 2세 전용 최고급 교복 풀세트]다.

내가 평생 입던 늘어난 티셔츠나 땀 냄새 쩐 운동복이랑은 차원이 다른, 귀티가 좔좔 흐르는 옷들.

그때, 문가에 서 있던 최 실장이 헛기침을 하더니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최 실장: 그럼, 편하게 갈아입어.

달칵, 문이 닫혔다.

그래, 당연한 거다. 꽃다운 여고생이 옷을 갈아입는데, 다 큰 아저씨가 있으면 안 되지.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내 영혼도 아저씨라는 거다.

나도 나가고 싶다. 제발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하지만 내 절규를 들을 리 없는 이모는 해맑은 얼굴로, 교복 옆에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손바닥만 한 하얀 천 조각 두 개.

보는 순간 머릿속 회로가 '툭' 하고 끊어졌다.

설아: …저기, 이모. 그… 혹시… 저거… 꼭… 입어야… 합니까?

이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신박한 소리니?' 하는 표정이었다.

이모: 당연하지! 교복 블라우스가 얼마나 얇은데! 안 입으면 큰일 나!

쿠궁.

논리적으로 반박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사실 제가 남자라서 입는 법을 몰라요'라고 할 수도 없잖아.

이모가 옷을 입혀주겠다고 팔을 뻗어오는 걸 기겁하며 뿌리쳤다.

설아: 아, 제가 할게요! 제가 애도 아니고!

내 나이 서른여섯이야, 서른여섯! (물론 껍데기는 아니지만.)

결국 옷을 빼앗듯 챙겨 화장실로 도망쳤다.

문을 닫고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여기서 규칙을 정하지 않으면, 남은 인생 내내 이 짓을 할 때마다 멘탈이 나갈 거다.

나는 눈을 감고 링 위에 오를 때처럼 세 가지를 새겼다.

첫째. 이 몸은 내 게 아니다. 잠시 맡은 거다.

둘째. 그러니 보지 않는다. 생각도 안 한다.

셋째. 필요한 것만 한다. 옷은 옷이다. 기능성 의류일 뿐이다.

정신 차려, 김철수.

눈을 감은 채 손만 움직였다.

아래는 그럭저럭. 위가 문제였다.

등 뒤에서 후크를 채우라고? 팔이 안 돌아간다. 관절 각도가 안 나온다.

'야! 왜 뒤로 잠그게 만들어놨냐! 누가 발명했어! 팔 뽑아서 쓰라고 만든 거야?!'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 결국 원주민식 생존 기술을 발휘했다.

앞에서 채운 다음, 휙 돌려서 뒤로 보내기.

됐다.

블라우스, 조끼, 치마. 지퍼를 올리고 나서야 눈을 떴다.

거울 속엔 청순. 가련. 여리여리.

내가 알던 김철수는 없고, 웬 병약 미소녀만 서 있었다.

설아: 나는…… 김철수였다고…… 아…… 젠장…….

그리고 내려다본 치마 길이가…….

허벅지 중간. 정확히 중간.

설아: …야아아….

치마 끝을 잡아 필사적으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안 내려간다. 놓으면 다시 올라간다. 원래 길이가 이따위다.

설아: 여자들은 겨울에 이거 입고 어떻게 돌아다니냐? 안 얼어 죽어?

아… 씨……. 진짜 이러고 장례식장 가야 한다고? 내 장례식에, 내가 이러고?

스스로에게 수백 번 물었지만, 정답은 하나였다.

그래. 가야 한다.

내 장례식이잖아. 쪽팔림은 순간이지만, 후회는 평생 간다.

멘탈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드르륵.

이모가 커다란 휠체어 하나를 꾹꾹 밀고 들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설아: …어, 이건 뭐예요?

이모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모: 병원에서 이동할 땐 무조건 타야지. 설아야, 네 심장병은…….

설아: 심장병?!

거의 비명을 질렀다.

심장병? 누구? 나?

나 김철수야! 평생 체력 하나 믿고 살아온 남자라고! 하프 마라톤 뛰고도 숨 한 번 안 헐떡이던 강철 체력인데?!

나는 양손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

설아: 아, 아뇨! 저… 괜찮아요! 진짜! 두 다리 튼튼해서 걸어갈 수 있어요!

이모는 눈을 세모꼴로 뜨며 말했다.

이모: 안 돼.

설아: …근데 저 진짜 멀쩡한데….

이모: 안. 돼.

그 말투가 너무 단호박이라 순간 움찔했다.

옆에 있던 최 실장까지 거들었다.

최 실장: 걸으면 위험해, 설아야.

난 거의 울상이 돼서 외쳤다.

설아: 저걸 타면 제가 더 위험해 보여요! 사람들이 다 쳐다볼걸요?!

이모: 설아야! 네 심장……!

설아: 제 심장 지금 겁나 잘 뛰어요! 아주 쿵쿵따 리듬 타고 있다고요!

진짜다. 무슨 F1 레이싱카 엔진 갈아 끼운 것 같다. 과거 내 심박수보다 더 안정적인데?!

하지만 이모는 가슴을 부여잡고 울먹였다.

이모: 아이고, 우리 애가 제정신이 아니네. 심장 멈추고 살아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걸어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설아: …네? 심장이… 멈췄었다고요?

이모: 응! 그게 바로 어제야!

설아: …네???

와장창. 멘탈이 다시 한번 박살 났다.

그럼 어제 이 아이가 쓰러졌던 거, 아니 죽었던 게 심장 때문이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무식하게 심폐소생술을 해댔던 거고.

최 실장도 심각한 얼굴로 덧붙였다.

최 실장: 혈압, 맥박, 산소포화도 전부… 조금 전까지 위험 수치였다고 들었어.

'이 사람아, 위험한 게 아니라 죽어 있었다니까? 심장도 안 뛰고, 맥박도 없고, 결정적으로 체온도 식어 있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멀쩡하다. 이팔청춘 그 잡채라고!

설아: …아니요? 지금은… 완전 쌩쌩한데요?

최 실장: 그럴 리가.

최 실장은 단호하게 팔짱을 꼈다.

최 실장: 너 나이 애들이 다 그래. '괜찮아요' 하고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픽 쓰러지지.

이모: 맞아!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설아: 제가요?!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합이 아주 척척 맞는다.

'아… 그건 '백설아'의 전적이지.'

하지만 이 사람들 눈에는 내가 여전히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으로 보이겠지.

말이 안 통한다. 통할 리가 없다.

설아: 저 정말 괜찮아요! 잠깐 걸어볼까요? 저 은근히 튼튼해요. 생각보다 헐크일 수도……!

난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교복 치마를 붙잡고 벌떡 일어섰다.

딱 그 순간.

이모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모: 앉아!

설아: 아, 넵.

즉사급 반사 신경. 보육원 시절부터 몸에 밴 생존 본능이 튀어나왔다.

이모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잔소리 폭격을 시작했다.

이모: 병약한 애가 이렇게 들떴다가 혈압 확 떨어지고 심장이 쿵 하고 멈추면 어쩌려고 그래!

설아: 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진짜예요… 통뼈라니까요….

이모: 너 이번이 세 번째 쓰러진 거야!

설아: ……예? 세 번이나요?

이모: 그러니까 휠체어 타!

설아: 지금은… 멀쩡한데….

이모: 네 몸은 멀쩡해도! 우리 마음은 멀쩡하지 않아!

최 실장이 쐐기를 박았다.

최 실장: 이모 말이 백번 맞아.

두 사람은 이미 '백설아 = 유리 인형' 모드로 진입했다.

나는 고개를 감싸 쥐었다.

'하아…….'

이건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다.

이모: 자, 타. 지금 당장!

설아: 끄으으으…….

이모: 설아야!

설아: …탑니다. 타요.

결국,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이모 + 경호원 철벽 수비]에 패배.

나는 얌전히 휠체어에 엉덩이를 붙였다.

털썩. 앉는 순간 치마가 또 훌렁 올라갔다.

난 황급히 치마를 잡아내리며 중얼거렸다.

설아: …진짜… 진짜 이러고 장례식장 가야 한다고…?

이모는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이모: 그래, 역시 우리 설아는 휠체어 탄 모습이 제일 청순해.

설아: ……그건 칭찬 아니에요, 이모.

최 실장은 비장하게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최 실장: 안전이 최우선이다, 설아야.

'내 인생의 안전은 이미 끝났어, 아저씨…….'

그리고 그렇게.

[교복 입은 병약 미소녀 + 과잉보호 경호 팀], 환장의 조합이 완성되어 내 장례식장으로 출정했다.

내가 나를 조문하러 간다.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