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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f Wiedersehen, Kim Cheol-soo.

von 외인 · 2026-04-02

저녁 식사라는 1차 관문을 통과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진정한 보스몹은 이제부터였다.

[퀘스트 : 씻고 잠옷으로 환복하시오.]

병원에서 세운 규칙 세 가지를 떠올렸다.

이 몸은 내 게 아니다. 보지 않는다. 필요한 것만 한다.

샤워기를 틀고, 천장의 타일 개수를 세면서 씻었다. 가로 열둘, 세로 스물넷.

그래도 손끝으로 전해지는 정보까지 막을 순 없었다.

설아: 하… 근육이 하나도 없어. 이게 사람 몸이냐, 젓가락이지.

트레이너 김철수의 직업병이 먼저 튀어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침대 위에 도우미 언니들이 준비해 둔 잠옷이 놓여 있었다.

……역시나. 핑크색 레이스 원피스 잠옷.

설아: 이 집구석은 레이스 아니면 옷을 못 만드나?

투덜거렸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잠옷을 꿰입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은 포근했지만, 마음은 전쟁터였다.

나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설아: 나는 백설아다.

설아: 이제부터 이게 나다.

설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까진 못하겠지만, 적응해야 산다.

수십 번 되뇌다 보니, 피곤함이 밀려왔다.

서른여섯 김철수의 영혼이 열여덟 소녀의 몸속으로 깊게 잠들었다.

* * *

번쩍.

눈이 떠졌다.

알람도 없었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

시계를 보니 정확히 오전 5시 00분.

설아: ……미치겠네.

이 빌어먹을 몸의 기억. 아니, 영혼의 기억인가.

선수 생활 15년 동안 매일 새벽 로드워크를 뛰던 습관은, 몸이 바뀌어도 그대로였다.

다시 자려고 눈을 감았지만, 심장이 쿵쿵 뛰며 '야! 운동 안 가냐? 근손실 온다!'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설아: 아오, 진짜!

결국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몸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다. 뛰어야겠다.

옷장을 열었다.

설아: 트레이닝복, 트레이닝복…….

없다.

샤랄라 원피스, 샤랄라 블라우스, 샤랄라 스커트뿐.

아디다스? 나이키? 그런 건 이 공주님 사전에 없는 브랜드였다.

설아: 운동복이 없다고? 이 비상식적인 옷장은 뭐야!

좌절하려던 찰나, 구석에 처박힌 옷 하나가 보였다.

학교 마크가 박힌 남색 옷.

[아이템 획득 : 고등학교 체육복 (상/하의)]

설아: 그래! 이거지!

나는 잽싸게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바로 사이즈였다.

설아가 워낙 뼈대만 남은 앙상한 몸이라 당연히 옷이 헐렁할 줄 알았건만,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이 녀석, 생각보다 키가 크다.

품은 맞는데 기장이 턱없이 부족했다.

상의는 팔만 살짝 들어도 배꼽이 '까꿍' 하고 인사할 기세인 강제 크롭티가 되어버렸고, 바지는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 수준이었다.

라벨을 확인해 보니 답이 나왔다.

아마도 고등학교 입학할 때 사 놓고, 아파서 학교를 못 가는 바람에 한 번도 입지 못한 채 처박아 둔 새 옷인 듯하다.

그동안 침대에 누워서 콩나물처럼 키만 쑥 자란 탓에, 멀쩡한 체육복이 졸지에 아동복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은 12월. 한겨울이다.

이 꼴로 나갔다간 심장마비 오기 전에 저체온증으로 먼저 갈 판이다.

설아: 보온 대책이 시급하다.

나는 옷장을 다시 뒤졌다.

서랍 구석에서 두꺼운 검은색 기모 스타킹을 발견했다.

오, 득템. 나는 주저 없이 스타킹을 신어 올리고, 그 위에 짧은 체육복 바지를 겹쳐 입었다.

'흠. 춥다고 바로 스타킹 찾을 생각을 하다니.'

나, 제법 여고생 패치가 완료된 건가? 아주 자연스러웠어. 칭찬해, 김철수.

설아: ……뭐, 기능성만 좋으면 됐지. 따뜻하면 장땡이야.

나는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방문을 살짝 열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저택.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대리석 계단을 내려와 정원으로 나갔다.

휘이잉.

새벽 공기가 칼날처럼 차가웠다.

대문 밖으로 나가서 동네 한 바퀴를 시원하게 돌고 싶었지만, 꾹 참기로 했다.

지금 이 집안 분위기에, 금방 죽다 살아난 딸내미가 새벽에 증발했다? 이모 기절하고 경찰 부르고, 집안이 뒤집어질 게 뻔하다.

'그래, 집도 운동장만 한데 굳이 나갈 필요 없지.'

그냥 이 넓은 정원을 트랙 삼아 뛰면 된다.

설아: 후우…….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우두둑.

설아: 아악!

목 한번 돌렸는데 뼈가 분리되는 줄 알았다.

유연성 제로. 근력 제로. 이 몸은 그냥 '총체적 난국'이다.

철저하게 준비운동을 한 후 숨을 고르고 달리기 시작했다.

저택 정원이 워낙 넓어서, 대문까지 찍고 돌아오면 대충 400m 트랙은 나올 것 같았다.

타탁, 타탁.

가벼운 발소리가 정적을 깼다.

처음 1분은 좋았다. 몸이 가벼우니까 날아갈 것 같았다. 와, 이 맛에 감량하나 싶었다.

하지만 정확히 3분 뒤.

설아: 헉… 헉… 으억…….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에 별이 번쩍거렸다.

[경고 : 체력이 방전되었습니다.]

설아: 야… 이… 썩을 몸뚱아……!

나는 내 허벅지를 주먹으로 치며 달렸다.

심장은 "더 뛸 수 있어! 엔진은 멀쩡해!"라고 외치는데, 다리 근육이랑 폐활량이 "주인님, 저희 파업합니다"라고 비명을 질렀다.

김철수의 정신력 vs 백설아의 저질 체력. 세기의 대결이었다.

설아: 안 멈춰! 으아아아!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남자 아니신데요.)

나는 악으로 깡으로 뛰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앞머리가 이마에 척 붙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펌프질을 해댔다.

이 고통. 이 숨 가쁨.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때였다.

미나: 꺄아아악!!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침 청소를 하러 나온 미나 언니가 나를 보고 주저앉아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다.

하긴, 머리는 산발에 눈 뒤집고 침 흘리며 뛰는 병약 미소녀라니. 호러긴 하겠지.

설아: 허억… 허억… 안녕… 하세요…?

내가 손을 흔들었는데 미나 언니는 답할 겨를도 없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1분 뒤.

저택 현관문이 쾅! 열리더니 누군가 맨발로 뛰쳐나왔다.

이모: 설아야!!!

이모였다.

그녀는 거의 울부짖으며 나에게 달려왔다.

이모: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설아: 하아… 하아… 운동… 이요… 운동…….

이모: 운동은 무슨 얼어 죽을 운동이야! 너 쓰러져! 심장 멈춘다고!

이모는 내 등짝을 스매싱하며(이건 좀 아팠다) 내 팔을 낚아챘다.

설아: 안 돼요… 저 아직… 두 바퀴… 남았…….

이모: 시끄러! 당장 들어가!

결국 나는 질질 끌려갔다. 마치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내 소중한 아침 유산소가…….

방으로 강제 송환당했다.

이모는 "한 번만 더 뛰면 아빠한테 이른다!"라고 협박하고 나갔다.

나는 방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설아: 헉헉.

아직도 숨이 차다. 하지만… 묘하게 찝찝했다.

설아: 이건 운동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야.

근육이 펌핑되는 그 느낌이 없다. 그냥 힘만 든 느낌.

이대로 멈추면 오늘 하루 종일 찝찝해서 못 견딘다.

설아: 안 되겠다.

나는 바닥에 깔린 푹신한 러그 위로 갔다.

방문이 잠겼는지 확인하고, 자세를 잡았다.

팔굽혀펴기.

설아: 하나.

부들부들.

팔이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가슴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설아: 으으으읍……!

겨우 하나 성공.

이게 말이 되냐. 나 김철수인데. 벤치프레스 120kg 들던 나인데!

푸시업 하나에 온몸의 혈관이 터질 것 같다니!

설아: 두울… 끄으응…….

거울 속의 내가 빨개진 얼굴로 용을 쓰고 있었다. 가관이다. 누가 보면 기합받는 줄 알겠다.

설아: 세엣……!

철푸덕.

세 개째에 무너졌다.

바닥에 얼굴을 박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처참하다. 내 피지컬 스탯, 초기화도 모자라 마이너스가 됐다.

나는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이번엔 윗몸일으키기다.

설아: 복근이라도… 만든다…….

낑낑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배가 찢어질 것 같다.

근데 웃긴 건, 배에 잡히는 뱃살이 하나도 없다. 그냥 가죽이랑 내장뿐이다.

설아: 설아야… 너 평소에 숨만 쉬고 살았니…….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좋다.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 이거 내 전문이잖아.

챔피언 벨트 따기 전에도 밑바닥부터 기어올라갔어.

설아: 두고 봐라. 내가 이 몸…….

끄으응- 차! (두 개 성공)

설아: ……식스팩은 아니더라도 11자 복근은 만든다.

방 안에는 거친 숨소리와, 소녀의 몸으로 빙의한 아저씨의 처절한 기합 소리만 울려 퍼졌다.

설아: 아자! 할 수 있다! 김철수! 아니 백설아! 악!!

* * *

달력을 확인하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12월 중순. 수능이 끝나고 기말고사 시즌도 마무리된 시점.

즉, 지금부터 겨울방학이라는 소리다.

설아: 나이스. 하느님이 죽으란 법은 없네.

만약 퇴원하자마자 바로 학교에 갔다면? 나는 아마 3일 만에 '자퇴'를 검색했을 거다.

이 저질 체력으로 등하교? 불가능. 이 앙상한 멘탈로 일진들 상대? 귀찮음.

신은 나에게 3개월의 유예 기간을 주셨다.

이 기간 동안 내 목표는 명확했다.

[메인 퀘스트 : 생존을 위한 피지컬 & 정치력 확보]

하나, 몸 만들기. 이 종이 인형 같은 몸을, 최소한 '나무 인형'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한다.

둘, 가족 공략. 이 냉랭한 집구석에서 내 편(혹은 방해 안 되는 중립)을 만든다.

자, [김철수식 지옥의 윈터 스쿨] 개강이다.

서진: 설아 학생… 저기, 이걸 정말 마시겠다고요?

서진 언니가 울상을 지으며 내 앞에 컵을 내려놓았다.

컵 안에는 거무튀튀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닭가슴살, 바나나, 아몬드, 그리고 브로콜리를 갈아 만든 내 특제 레시피.

설아: 네. 남기지 말고 싹싹 갈아달라고 했잖아요.

서진: 하, 하지만… 냄새가…….

설아: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죠. 잘 먹겠습니다!

나는 코를 막고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설아: 으허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비릿하고 걸쭉한 맛.

그래, 이 맛이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기뻐하는 맛.

내가 빈 컵을 탁 내려놓자, 주방 아주머니가 경악한 표정이다.

미나: 세상에, 설아 학생이 저걸 원샷했어.

미나: 입맛이 변해도 너무 변한 거 아니에요?

그때, 이모가 달려왔다.

이모: 설아! 너 또 이상한 거 먹었니? 내가 달콤한 딸기 스무디 해준다니까!

설아: 이모, 딸기 스무디는 당류가 너무 높아요. 근손실 와요.

이모: 근… 뭐?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모는 내 등짝을 찰싹 때리며 내 손을 주물렀다.

이모: 안 그래도 뼈밖에 없는 애가, 맛있는 걸 먹어서 살을 찌워야지. 왜 자꾸 맛없는 것만 먹어?

설아: 이게 다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저 오늘 점심은 소고기 안심으로 부탁해요. 300g 정량 맞춰서.

나는 알통 없는 팔을 들어 뽀빠이 흉내를 냈다.

설아: 보세요. 여기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거.

이모: 어우, 몰라! 우리 설아가 격투기 선수 귀신이라도 씌었나 봐!

이모는 펄쩍 뛰었지만, 나는 씩 웃었다.

사실 씌인 거 맞거든요.

이모: 그리고 설아 너, 말투가 왜 자꾸 그 모양이니. '정량 맞춰서'가 뭐야. 선머슴처럼.

설아: 아, 하하하. 미안, 이모.

내가 아차 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36년 동안 밴 버릇을 하루아침에 고치려니 어렵네.

처음엔 기겁하던 집안사람들도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자 조금씩 변해갔다.

내가 새벽마다 마당을 뛰고 들어오면, 서진 언니가 미리 수건을 대기하고 있다가 건네줬다.

서진: 설아 학생, 오늘 기록은 좀 단축됐어요?

설아: 어, 서진 언니. 오늘은 30초 줄였어.

서진: 오, 대박! 진짜 멋있어요!

병약해서 손 많이 가는 '짐' 같은 존재에서, 스스로 땀 흘리고 씩씩하게 인사하는 '활력소' 같은 존재로.

내 평판은 아주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바뀌고 있었다.

1월의 어느 새벽.

창밖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겨울 왕국.

보통의 여고생이라면 "와~ 눈이다~ 낭만적이야~" 하고 SNS에 사진이나 올렸겠지만.

설아: ……하체가 부실해.

나는 거울 속의 내 다리를 보며 혀를 찼다.

상체는 이제 좀 폼이 올라왔는데, 하체는 여전히 부실공사다.

설아: 눈 올 때 뛰는 게 하체 강화엔 직빵이지.

나는 아빠 카드로 지른(결제 문자가 떴을 때 아빠의 표정이 궁금했다) 나이키 롱패딩을 껴입고, 털모자까지 눌러쓴 채 정원으로 나갔다.

뽀드득, 뽀드득.

발이 푹푹 빠졌다. 허벅지에 평소보다 두 배의 부하가 걸린다.

이거다. 이게 바로 특수부대 혹한기 훈련 스타일이지.

설아: 흡! 후우! 흡! 후우!

입김을 하얗게 뿜으며 정원을 돌았다.

한 바퀴, 두 바퀴. 땀이 나서 패딩 지퍼를 살짝 내렸다.

그때, 2층 테라스 문이 벌컥 열렸다.

유리: 야! 백설아!

내 동생, 백유리였다.

얇은 잠옷 바람으로 나와서 기겁을 하고 있었다.

유리: 너 미쳤어? 지금 영하 10도야! 돌았어?!

설아: 어, 안 춥다! 이게 다~ 혈액순환에 좋은 거야! 너도 내려와! 같이 뛰자!

내가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유리는 질색하며 팔로 X자를 그렸다.

유리: 아, 미친… 진짜 미쳤나 봐! 들어와! 엄마가 알면 나까지 혼난단 말이야!

설아: 안 죽어! 심장 쌩쌩해! 걱정해 줘서 고맙다, 동생아!

유리: 누, 누가 걱정했대!

유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창문을 쾅 닫았다.

하지만 나는 봤다.

커튼 뒤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림자를.

내가 다 뛰고 들어갈 때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걸.

'혹시 나 쓰러지면 119 신고하려고 대기 타는 건가?'

……제법 기특한 동생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서재 창가에서, 아버지 백 회장이 커피를 마시며 눈밭을 뛰는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도.

평소 같았으면 "들어오라"고 했을 양반이, 웬일로 그냥 보고만 있다.

아마 눈밭에 찍힌 내 발자국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내 의지처럼 보였기 때문일까.

몸은 이렇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산이 남았다.

다음 주 월요일. 대치동 1타 강사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