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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조문하다

von 뮤즈 · 2026-04-02

병원 지하 2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향 냄새. 육개장 냄새. 그리고 눅눅한 국화꽃 냄새.

지겹도록 맡아본, 하지만 내 것이 될 줄은 몰랐던 냄새다.

최 실장: 천천히 갈게, 설아야.

최 실장이 휠체어를 조심스레 밀었다.

바퀴가 대리석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드르륵, 드르륵.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말해서, 쪽팔렸다.

봐라, 벌써 몇몇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듯 쳐다보고 있지 않냐.

내 장례식장에 휠체어 탄 미소녀라니. 이건 무슨 아침 드라마 설정이냐고.

복도 끝, '특 3호실'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입구에는 화환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래도 내 장례식이라고 화환이 오긴 오는구나. 보낸 사람 이름들을 훑어봤다.

'대한 격투기 협회장'

'청호 체육관 관장 이대수'

'…행복 캐피탈 김 실장'

……야, 김 실장 저 양반은 왜 보냈대? 빚 다 갚았는데? 혹시 이자 안 갚았다고 뻥 치려는 건 아니겠지?

죽어서도 빚쟁이는 무서운 법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빈소의 다른 쪽 벽면을 빈틈없이 메운, 내 키보다 훨씬 큰 최고급 3단 화환들의 행렬.

'백산그룹 대표이사 백도훈'

'백산건설 사장 OOO'

'백산전자 임직원 일동'

……

죄다 모르는 이름들이다.

아니, 백산그룹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 있다. 몇 달 전인가 국내 100대 기업에 진입했다나 뭐라나, 뉴스에서 떠들썩했던 기억이 난다.

'잠깐, 내 지금 이름이 백설아였지?'

백산그룹 회장의 성도 백 씨, 내 이름도 백 씨.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아마도 이 '백설아'라는 아이의 집안이 바로 그 백산그룹인 모양이다.

그러면 이 상황이 이해가 간다. 그들 입장에선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대신해 죽은 생명의 은인일 테니까.

이 정도 호화 장례식은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특실 대관료, 최고급 수의, 그리고 저 비싼 화환들까지.

설아: 이야… 역시 대기업 회장님이라 스케일이 다르네.

딸 살려준 보답으로 장례식 하나는 황제처럼 치러주는구먼.

기왕이면 위로금으로 현찰도 두둑하게 챙겨줬으면 좋겠는데.

아, 맞다. 나 받을 유가족이 없지.

젠장, 억울해서 관뚜껑 열고 나오고 싶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쏟아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공기가 멈췄다.

외부가 화려하고 실내가 넓다 보니 식장 안은 그만큼 더 썰렁했다.

손님이라곤 구석에 모여 앉아 소주를 까고 있는 격투기 선후배 놈들, 그게 다였다.

그런데 내 등장과 동시에, 그 험악한 아저씨들이 일제히 입을 떡 벌리고 동작을 멈췄다.

그럴 만도 하지. 여기는 지금 '마초들의 소굴'이다.

귀는 만두처럼 뭉개지고, 코는 한두 번씩 내려앉았고, 팔뚝은 내 허벅지보다 두꺼운 인간들.

평균 체중 150kg, 인상 더러움 지수 120%인 짐승들 사이에, 갑자기 '천사표 병약 미소녀'가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으니.

마치 오크 소굴에 엘프가 잘못 들어온 꼴이랄까.

설아: …….

정적.

누군가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시선들을 무시하고,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저기 있다.

꽃무덤 속에 파묻힌, 영정 사진.

검은 띠가 둘러진 액자 속에서, 내가 웃고 있었다.

지난번 프로필 촬영 때 억지로 웃으라 해서 지었던, 그 어색한 미소.

[故 김철수 (36세)]

이름 옆에 적힌 나이가 너무 낯설었다.

서른여섯. 아직 한창인데.

아직 해본 것도 별로 없는데.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진짜 갔구나, 나.'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까지는 그냥 악몽 같았는데, 내 얼굴을 보는 순간 현실감이 뺨을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저기 있는 건 나고, 여기 있는 것도 나다.

이 기괴한 분리감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나는 멍하니, 아주 오랫동안 내 얼굴을 바라봤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모: ……흐흑.

이모였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며 중얼거렸다.

이모: 세상에… 저렇게 젊은 분이… 우리 설아를 살리려고…….

아. 그렇지.

지금 사람들 눈에는 내가 '충격받아 넋이 나간 소녀'로 보이겠구나.

사실은 '내 영정 사진이 너무 못 나와서 충격받은 아저씨'인데 말이다.

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여기서 "야! 사진 포샵 좀 하지 그랬냐!"라고 소리칠 순 없으니까.

그때, 상주 완장을 찬 남자가 다가왔다.

검은 정장이 터질 듯한 덩치. 퉁퉁 부은 눈.

강지훈이다.

내 체육관 후배이자, 내가 친동생처럼 아끼던 놈.

설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훈이의 목소리가 쩍 갈라져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눈물이 확 맺혔다.

아, 쪽팔리게 후배 녀석 앞에서 울 수는 없는데.

녀석은 나를, 아니 설아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무 작고, 하얗고, 눈부신 존재가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휠체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야, 인마. 왜 이렇게 청승을 떨어? 형 안 죽었어!' 하면서 저 널찍한 등짝을 스매싱하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하지만. 내 손은 너무 작고 여렸다.

이 손으로 때려봤자 안마 수준도 안 될 거다.

나는 끓어오르는 본능을 꾹 누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지훈이는 덩치에 안 맞게 쭈뼛거렸다.

평소엔 링 위에서 짐승처럼 날뛰던 놈이, 여고생 앞에선 순한 양이네.

설아: 저 대신…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강지훈: …….

설아: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참 간지럽다.

하지만 지훈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울컥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강지훈: 아닙니다… 형님도… 아니, 철수 형도… 학생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야, 울지 마. 덩치 값 못 하게.'

속으로 외쳤지만, 녀석의 눈물을 보니 나도 코끝이 찡해졌다.

예전의 나는 웬만해선 울지 않던 사람이다. 아니, 우는 걸 잊어버리고 살았다고 해도 될 거다.

그런데 지금은 몸이 이래서 그런가, 눈물이 나도 모르게 떨어졌다.

이모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준다.

아, 이모. 나도 눈물 정도는 내가 닦을게요.

그래도 내 인생, 아주 헛살진 않았나 보다. 저렇게 진심으로 울어주는 놈도 있고.

그때, 뒤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 관장: 어이구, 귀한 손님이 오셨네!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는 무리. 격투기 동료들이다.

귀가 만두처럼 찌그러진 '불곰' 박 관장님, 그리고 코가 휜 '독사' 최 선수.

다들 내가 알던 그 '괴물' 같은 아저씨들이다.

그들이 다가오자 최 실장이 즉각 반응했다.

탁. 내 앞을 막아서며 눈빛을 빛냈다.

최 실장: 물러서십시오.

아, 아저씨. 이 사람들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차마 입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검은 양복의 경호원 vs 떡대 좋은 격투기 선수들. 이건 뭐, 액션 영화 찍나?

박 관장님이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박 관장: 아이고, 무서워라. 해치려는 거 아니오. 그냥, 우리 철수가 목숨 바쳐 구한 아가씨라길래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했지.

관장님은 내 쪽을 보며 혀를 찼다.

박 관장: 쯧쯧. 이렇게 어린 아가씨였어? 철수 그 녀석, 갈 때도 참 그다운 짓 하고 갔구먼.

그다운 짓?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평소에 사람 구하고 다니는 이미지는 아니었잖아? 오히려 링 위에서 사람 패는 이미지였지.

아니면 예쁜 여자를 밝혔다는 뜻인가?

그때,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노신사가 일어났다.

낡은 양복에, 희끗희끗한 머리.

우리 보육원 원장님이었다.

원장님: 지훈아, 손님께 무례하게 굴지들 말라고 해라.

원장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힘이 있었다.

선배들도 원장님을 알아보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원장님은 천천히 내 휠체어 앞으로 다가왔다.

주름진 얼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늙으셨다.

항상 나한테 '이 썩을 놈아, 밥값은 하고 다녀라'라고 잔소리하시던 분인데.

지금은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 목소리, 그 얼굴을 바라보니 눈물이 왈칵 났다.

원장님: 허허, 눈물이 많은 아가씨네. 그만 울어요.

원장님은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따뜻하고 거친 손이 내 작은 손을 덮었다.

원장님: 아가씨가… 설아 양인가요?

설아: …네.

원장님: 먼 걸음 해줘서 고마워요.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원장님은 내 손을 토닥였다.

그 손길이 너무 익숙해서, 또 눈물이 핑 돌 뻔했다.

원장님: 우리 철수가… 참, 착한 녀석이었어요.

'……예?'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착해? 누가? 내가?

원장님, 저 어릴 때 원장실 유리창 세 번 깨먹었는데요?

원장님은 먼 산을 바라보며, 마치 동화 속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었다.

원장님: 생긴 건 산적 같아도, 마음은 비단결 같은 놈이었지. 어릴 때부터 꽃 한 송이도 함부로 꺾지 못하는, 그런 여린 아이였답니다.

'……뻥치시네.'

나는 속으로 태클을 걸었다.

꽃을 안 꺾은 게 아니라, 꺾을 시간에 매점에 빵 훔치러 갔었죠.

원장님: 지나가는 길고양이도 그냥 못 지나치고 꼭 밥을 챙겨주던, 천사 같은 녀석이었는데…….

'그건 쥐 잡아먹으라고 둔 거잖아요!'

원장님의 미화(美化) 스킬이 만렙을 찍고 있었다.

옆에 있던 지훈이도 "맞습니다, 형님은… 천사셨죠."라며 맞장구를 쳤다.

야, 강지훈. 너 나한테 스파링하다가 옥수수 털릴 뻔한 거 잊었냐? 그게 천사의 주먹이더냐?

하지만 나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청순가련 백설아'니까.

원장님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원장님: 아마 그 순간에도, 철수는 아가씨가 걱정돼서 뛰어들었을 겁니다. 원래 남을 위해선 자기 몸 하나 안 아끼던 바보 같은 녀석이니까요.

……그건. 그건 좀 맞네.

바보 같은 놈. 대책 없이 몸부터 나가는 놈.

원장님의 거짓말 섞인 칭찬이, 왜 이렇게 가슴을 찌르는지 모르겠다.

과장이 심한데, 뻔한 거짓말인데.

그 속에 담긴 애정이 너무 진해서,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설아: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원장님보다 먼저 가서 죄송하고. 제대로 효도 한번 못 해 드려서 죄송하고. 이렇게 낯선 모습으로 와서,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해서 죄송합니다.

원장님은 웃으며 일어섰다.

원장님: 아니에요. 아가씨 잘못이 아닙니다. 철수도… 아가씨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주는 걸 가장 바랄 거예요. 그게 녀석이 남긴 마지막 선물이니까.

마지막 선물.

나도 모르게 내가 나한테 한 선물?

그 단어가 심장에 쿵 하고 박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영정 사진 속의 나를 다시 봤다.

그래. 김철수는 죽었다. 하지만 김철수가 살려낸 생명이 여기 있다.

이 작고 약한 몸뚱이. 이게 내 목숨값이다.

'……그래, 알겠어요, 원장님.'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어디 한번, 살아볼게요. 이 비싼 몸으로.

이왕 선물 받은 거, 본전 뽑을 때까지 악착같이 살아봐야지.

설아: 조문… 해도 될까요?

내 말에 지훈이가 화들짝 놀라며 길을 터주었다.

강지훈: 아, 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최 실장이 휠체어를 밀고 제단 앞으로 나갔다.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꽃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향 냄새가 훅 끼쳤다.

나는 눈을 감고, 나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가라, 김철수.'

'고생 많았다.'

'다음 생엔… 아니, 이번 생엔 좀 더 폼나게 살아보자.'

눈을 떴을 때, 영정 사진 속의 내가 아까보다 조금은 더 편안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 탓이다. 사진이 바뀔 리가 없잖아.)

돌아서 나오려는데, 뒤에서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근데 저 아가씨… 진짜 예쁘지 않냐?"

"천사네, 천사. 철수 형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살렸네."

"형수님 삼고 싶… 억!"

"미친놈아, 애야. 철수 형이 귀신 돼서 쫓아온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내 몸을 탐해?

내가 다시 살아나면 니들 로우킥부터 한 대씩 갈긴다.

나는 속으로 으르렁거리며, 하지만 겉으로는 세상 슬픈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는 길.

등 뒤로 들리는 곡소리가 유난히 구슬펐다.

하지만 내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마치 나에게, 이제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안녕, 김철수.

아니, 안녕 김철수의 몸.

안녕, 김철수의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