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의 회개와 여왕의 몰락
von 외인 · 2026-10-17
시험 기간의 학교는 절간 같다고 했다.
그 절간에, 어울리지 않는 덩치 하나가 서 있었다.
방과 후. 도서관에서 나온 우리 앞에.
야구부 점퍼를 입은 이진성이, 음료수 한 박스를 안고 복도 벽에 붙어 있었다.
피구장에서 시속 130킬로짜리 위협구를 던졌던 바로 그 팔로.
유리: 어, 어…….
유리의 발이 그 자리에 멈췄다.
얼굴에서 핏기가 살짝 빠졌다.
그 공이 어디로 날아오고 있었는지,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다.
내가 반 발짝 앞으로 나서려는데, 진성이 먼저 움직였다.
쿵.
음료수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유리 앞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운동부 특유의, 관절이 부서질 것 같은 90도였다.
이진성: 미안했다!
복도가 쩌렁 울렸다.
지나가던 애들이 죄다 돌아봤다.
이진성: 그날 그 공…… 너한테 날아간 공. 변명 안 할게. 내가 던졌고, 내 잘못이야. 정말 미안했다.
유리는 눈만 껌뻑거렸다.
사과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애처럼.
하긴, 이 학교에서 유리한테 허리 숙인 인간이 지금까지 몇이나 됐을까.
유리: ……고, 고개 들어. 부담스럽잖아.
유리가 겨우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 끝이 아주 살짝 떨렸지만, 유리는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사과를 다 받았다.
많이 컸다, 백유리.
진성은 허리를 펴고 이번엔 나를 봤다.
그리고 다시 90도.
이진성: 백설아. 너한테도. 그 공 네가 안 잡았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고맙고, 미안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설아: 사과는 우리한테만 하면 되는 게 아닐 텐데. 그날 공 맞은 애들이 한둘이 아니잖아.
이진성: 했어.
진성이 고개를 들었다.
이진성: 우리 반, 너네 반. 그날 코트에 있던 여학생들 전부. 한 명씩 찾아가서 했어. 이 음료수가 마지막 박스야.
옆에서 세린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학교 정보란 정보는 다 꿰고 있는 전직 정보통이 슬쩍 확인 사살을 했다.
김세린: 사실이야. 얘 요즘 쉬는 시간마다 사과 순례 다니는 거 목격담이 자자해. 1학년 애들이 '사과 맨'이라고 부르더라.
설아: ……사과 맨.
별명 한번 처참하다.
한나가 팔짱을 낀 채 진성이를 아래위로 훑었다.
유도부의 눈은 정직하다. 덤빌 놈인지, 숙일 놈인지.
최한나: 뭐, 도망 안 가고 다 돌았으면 인정.
한나의 짧은 판정에 진성의 어깨가 아주 조금 펴졌다.
진성의 귀가 빨개졌지만, 녀석은 도망가지 않았다.
이진성: 웃겨도 할 수 없어. 그날 이후로 계속 생각했거든.
녀석은 주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진성: 혜진이가 그랬어. 장난이라고. 살짝 겁만 주면 된다고. 근데…… 공을 놓는 순간 알았어. 아, 이건 빈볼이구나. 야구 하는 놈이 세상에서 제일 하면 안 되는 짓이구나.
설아: 알면서 던졌네.
이진성: 어. 알면서 던졌어.
변명이 나올 타이밍에 인정이 나왔다.
호오.
내 안의 김철수가 고개를 들었다.
링에서도 그렇다. 지고 나서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 하는 놈은 평생 그대로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놈만 다음 시합이 달라진다.
설아: 그 말 들었으니 됐어.
나는 음료수 박스에서 하나를 꺼내 뚜껑을 땄다.
사과 접수 완료라는 뜻이다.
진성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설아: 대신 조건이 있어.
이진성: 뭔데. 뭐든지.
설아: 그 공, 다시는 사람한테 던지지 마.
나는 녀석의 오른팔을 턱으로 가리켰다.
설아: 미트에만 던져. 그 공은 그러라고 있는 거야.
진성의 눈이 흔들렸다.
뭔가 대단한 말을 들은 표정인데, 사실 김철수식 상식이다.
주먹이든 공이든, 갈 곳이 정해져 있는 법이다.
설아: ……그리고 하나 더. 이건 서비스다.
나는 음료수를 홀짝이며 지나가듯 말했다.
설아: 너 어깨로만 던지더라.
이진성: 어?
설아: 그날 네 공, 빠르긴 한데 끝이 죽었어. 상체가 먼저 열리니까 힘이 새는 거야. 공은 손끝이 아니라 발끝에서 시작하는 건데.
진성이 멍하니 나를 봤다.
설아: 하체 회전이 먼저, 허리가 따라가고, 팔은 맨 마지막에 채찍처럼. 순서만 바꿔도 공 끝이 살 거다.
이진성: ……너, 야구 해 봤어?
설아: 아니. 근데 몸 쓰는 건 다 똑같아.
훅을 쏠 때도, 하이킥을 찰 때도, 삽으로 쥐를 잡을 때도.
회전력은 땅에서 올라온다.
진성은 한참 동안 자기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더니, 운동장 쪽으로 뛰어갔다.
가방도 안 가지고.
유리: ……쟤 뭐야?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설아: 몰라. 급한가 보지.
세린이가 수첩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김세린: [백씨 자매 공용 채점표]에 등록해야 하나. 사과 태도 A, 눈치 C, 퇴장 D…….
설아: 기각. 쟤는 그런 거 아니야.
저건 연애 세포가 아니라 야구 세포가 불붙은 눈이었다.
* * *
중간고사가 끝난 주.
학교가 다시 시끄러워졌을 때, 소란의 중심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박혜진.
발단은 그 피구 영상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닌 그 영상을, 어느 눈썰미 좋은 놈이 0.5배속으로 돌려 본 거다.
[느리게 보면 보이는 것들.jpg]
공이 날아가기 직전, 코트 구석에서 박혜진이 이진성에게 귓속말을 하는 장면.
그리고 신호를 보내듯 까딱하는 턱짓.
짤의 제목은 살벌했다.
[여신 저격 사주한 흑막]
아버지의 법무팀은 나와 유리의 사진만 지웠다.
혜진이 짤은, 남의 일이었다.
"야, 저 여자애가 시킨 거였어?"
"동생 쪽 노리고 던지게 한 거래. 소름."
"와, 어쩐지. 사과하러 다니는 야구부 걔는 '내가 병신이었다'고만 하던데. 누가 시켰는지는 끝까지 말 안 하더라."
말 안 해도 다 나왔다.
0.5배속은 거짓말을 안 하니까.
그때부터, 여왕의 왕국이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강약약강의 법칙은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다.
혜진이 옆에 붙어 있던 이유가 '급'이었던 애들은, 혜진이 옆에 있는 게 '흠'이 되는 순간 뒤도 안 돌아봤다.
급식실에서 그걸 확인했다.
예전에 유리가 소시지를 뺏기던 바로 그 테이블.
항상 예닐곱이 둘러앉아 깔깔거리던 그 자리에, 이제 혜진이와 꼬붕 둘만 앉아 있었다.
김소영마저 슬그머니 다른 테이블로 옮겨 간 지 오래였다.
복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혜진: 야, 김소영! 같이 가!
혜진이가 부르는 소리에, 소영이는 못 들은 척 걸음을 빨리했다.
한 달 전만 해도 그 부름 한 번에 매점까지 뛰어갔다 오던 애였다.
권력의 온도는 그렇게 잰다.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대답하는 속도로.
그리고 웃긴 건, 그 빈자리가 흘러간 방향이었다.
"세린아, 그거 진짜야? 혜진이가 시켰다는 거."
"세린아, 너는 알고 있었지?"
학교의 정보 문의가 전부 세린이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한때 혜진이 옆에서 알랑거리던 정보통이, 이제는 여신의 매니저이자 이 학교 소문의 최종 검수처가 된 것이다.
세린이는 그 문의들을 아주 우아하게 즐기고 있었다.
김세린: 글쎄. 확인된 것만 말해 줄게.
전직이 확실히 체질에 맞는 모양이다.
그리고 몰락하는 권력이 으레 그러듯, 혜진이는 최악의 수를 뒀다.
박혜진: 야, 그거 들었어? 백설아 걔, 그 피구 영상 조작이래. 원래 몸 약한 척 컨셉이었다잖아. 성형했다는 말도 있고.
새 소문을 풀기 시작한 거다.
자기네 단톡방에서, 은밀하게.
문제는 이 학교의 정보 유통망이 이제 누구 손에 있느냐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세린이가 인쇄물 한 장을 팔랑거리며 우리 자리로 왔다.
김세린: 왔어.
설아: 뭐가.
김세린: 박혜진의 마지막 발악.
인쇄물에는 단톡방 캡처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보낸 사람: 박혜진. 시간, 날짜, 프로필 사진까지.
설아: 이거 어떻게 구했어?
김세린: 그 방에 있던 애 셋이 나한테 먼저 보냈어. 셋 다.
세린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김세린: 침몰하는 배에서는 쥐가 제일 먼저 뛰어내리는 법이거든.
전직 정보통은 괜히 정보통이 아니었다.
설아: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법무팀?
내 말에 세린이는 고개를 저었다.
김세린: 아니. 이건 내가 할래.
녀석의 눈에 오랜만에 그 독기가 돌아와 있었다.
김세린: 나 쟤한테 뺨 맞았잖아. 도둑년 소리 들으면서. 그때 넌 내 편 들어줬고.
세린이는 인쇄물을 반듯하게 접었다.
김세린: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가서 말해 줄 거야. 아주 예의 바르게.
다음 쉬는 시간, 세린이는 정말로 옆 반에 다녀왔다.
나중에 들은 목격담에 따르면, 대화는 딱 세 마디였다고 한다.
세린이가 캡처를 혜진이 책상에 내려놓으며: "허위사실 유포는 명예훼손이야. 네가 좋아하는 무고죄보다 세더라?"
혜진이가 하얗게 질리며: "너, 너 뭐야……."
세린이가 웃으며: "지난번엔 설아가 왔지? 이번엔 나야. 어때, 기분이."
그걸로 끝이었다.
그날 오후, 혜진이네 단톡방은 폭파됐고, '조작설'은 발원지와 함께 증발했다.
여왕의 마지막 카드였던 "우리 아빠 로펌인데"는 꺼내 보지도 못했다.
꺼냈어도 소용없었을 거다.
요즘 이 학교에서 그 말은 "그래서? 걔네는 그룹인데"라는 하품으로 돌아오니까.
방과 후, 차에 타면서 유리가 창밖을 봤다.
혜진이가 혼자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던 무리도, 깔깔거리던 웃음소리도 없이.
유리: ……쌤통이다.
유리가 조그맣게 말했다. 그리고 잠깐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
유리: 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다. 생각보다 안 시원해.
설아: 원래 그래.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설아: 강약약강은 원래 저렇게 끝나. 링 밖에서 지는 놈들은 소리도 없이 지거든. 네가 뭘 안 해도.
유리: ……흠.
설아: 왜.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냐?
유리: 아니. 나 쟤 이제 안 미워하기로 했어.
유리는 창문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유리: 미워하는 것도 에너지 들더라. 난 요즘 바빠. 공부도 해야 되고, 성적도 지켜야 되고.
오, 백유리.
전교권 진입하더니 말에 여유가 붙었다.
동생의 성장이 흐뭇해서, 나는 몰래 웃었다.
* * *
그 주 금요일 아침.
등교하던 우리는 운동장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꼭두새벽부터 야구부 유니폼 하나가 타이어를 허리에 묶고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이진성이었다.
최한나: 쟤 요즘 매일 저래.
한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최한나: 유도부 아침 훈련 나올 때마다 보는데, 하체 운동만 미친 듯이 해. 러닝, 타이어, 스쿼트. 야구부 코치님이 '너 뭐 잘못 먹었냐'고 물어볼 정도래.
그리고 그날 점심시간.
운동장 쪽에서 파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청명하게 찢어지는, 포수 미트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
전에 듣던 소리와 달랐다.
공 끝이 살아 있는 소리다.
"우와아아!" 하는 야구부의 함성이 뒤따랐다.
잠시 후, 진성이가 급식실로 뛰어 들어왔다.
땀범벅이 된 채로, 곧장 우리 테이블로.
이진성: 백설아!
설아: 밥 먹는다. 왜.
이진성: 구속이 7킬로 올랐어! 코치님이 폼 누구한테 배웠냐고, 스카우트 오면 보여 주자고……!
녀석은 숨을 헐떡이며, 세상에서 제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진성: 발끝에서 시작한다는 거. 그 한마디에 3년 묵은 게 뚫렸어. 저기, 나 너를 스승님으로…….
강태양: 안 돼!!!
번개같이 태양이가 끼어들었다.
숟가락을 든 채로 진성이와 나 사이를 몸으로 막아섰다.
강태양: 사부님은 나만의 사부님이다! 넌 늦었어! 순번 밀려!
이진성: 뭐? 야, 강태양. 넌 격투기잖아. 난 야구 쪽 스승님으로…….
강태양: 종목 불문! 사부님의 수제자는 나 하나다!
이진성: 그럼…… 누님. 누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강태양: 누님도 안 돼!
이진성: 네가 뭔데 그것까지 정해?!
밥상머리에서 덩치 둘이 유치하게 실랑이하는 꼴을 보며, 나는 조용히 국을 떠먹었다.
그 실랑이의 결말은 다음 날 아침에 났다.
등굣길, 차에서 내리는 우리 앞에.
야구부 전원이 교문 옆에 두 줄로 도열해 있었다.
"누님들! 좋은 아침입니다!"
아홉 명의 인사가 합창으로 터졌다.
90도 폴더 인사. 각 잡힌 모자. 반짝이는 눈.
유리: ……나, 나까지 왜?!
유리가 기겁하며 내 뒤로 반 발짝 숨었다.
설아: 저 자식들 뭐야? 언니가 시켰어?
설아: 내가 미쳤냐.
맨 앞의 진성이가 씩씩하게 외쳤다.
이진성: 저희 야구부는 두 분 누님들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등하굣길에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은혜라니. 폼 하나 고쳐 준 것뿐인데.
최 실장이 운전석에서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 실장: 경호 인력이 늘었군. 무급으로.
점심시간, 세린이가 수첩을 넘기며 속삭였다.
김세린: 참고로 어제 야구부에서 단체 문의 왔어. [백씨 자매 공용 채점표] 등록 조건이 뭐냐고. 아홉 명.
설아: 기각. 전원 기각.
김세린: 그럴 줄 알았어. 근데 걔네 목적이 좀 달라. 연애가 아니라…… 뭐랄까, 입단?
입단은 또 뭐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피구장의 저격수는 사과 맨이 됐고, 사과 맨은 신도 1호가 됐다.
여왕은 조용히 몰락했고, 내 동생은 미워하는 데 쓸 에너지를 성적 지키는 데 쓰기로 했다.
시끄러웠던 봄이 그렇게 정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고사 성적이 각 가정으로 날아든 며칠 뒤.
평화롭던 급식실에, 나라 잃은 듯한 비통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태양: 사부니임…… 으흐흑! 저 이제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