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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 강림 후폭풍

von 외인 · 2026-10-13

다음 날 아침. 등굣길 세단 안.

유리가 말없이 스마트폰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어제 운동장. 물벼락을 뒤집어쓰고 일어나는 나.

누가 찍었는지 각도도 기가 막히다. 조회수가… 어?

설아: 삼만?

유리: 새벽에 오만 넘었어. 옆 학교 애들 커뮤니티에도 퍼졌고.

유리가 한숨을 쉬며 폰을 거둬들였다.

유리: 제목이 뭔 줄 알아? '한빛고에 여신 있음(실화)'.

설아: ……내려달라고 해.

유리: 세린이가 새벽 내내 내리고 다녔어. 근데 내리는 속도보다 퍼지는 속도가 빨라.

운전석의 최 실장이 백미러를 힐끔 봤다.

최 실장: 설아야.

설아: 네.

최 실장: 교문 앞이 평소랑 다르다. 내리기 전에 마음의 준비 해라.

설아: ……무슨 준비요?

최 실장: 연예인 데뷔했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다.

교문 앞은, 진짜였다.

평소보다 세 배는 많은 학생들이 교문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등교하는 척하면서 아무도 등교하지 않는 기이한 광경.

내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공기가 술렁였다.

"떴다."

"실물이다, 실물."

"야, 안경 다시 썼는데? 그래도 예쁘네…."

나는 새로 산 뿔테 안경(2호기)을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걸었다.

후배로 보이는 여학생 둘이 용기를 내서 튀어나왔다.

여학생1: 서, 선배님! 어제 진짜 멋있었어요!

여학생2: 저…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설아: ……마음대로 해라.

"꺄아악! 허락받았어!"

아니, 뭘 허락받았다는 거야.

옆에서 유리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따라오다가, 타반 여자애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너 백설아 동생 맞지?"

예전 같으면 질색했을 호칭이다.

그런데 유리는 잠깐 멈칫하더니, 어깨를 펴고 대답했다.

유리: 어. 내가 동생이야.

……저 녀석 봐라?

교실은 더 가관이었다.

내 책상 위에 정체불명의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초코우유 세 개, 비타민 음료 두 병, 편지 봉투 네 통, 그리고 웬 인형 하나.

설아: 이게 다 뭐야.

김세린: 조공이지 뭐긴 뭐야.

세린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눈 밑이 거뭇하다. 밤새 사진 내리느라 그런 모양이다.

김세린: 오늘부로 내가 네 비공식 매니저다. 이의 있어?

설아: 있어. 나 매니저 필요 없…….

김세린: 없지? 좋아. 첫 번째 업무 지시. 모르는 애가 주는 음료는 마시지 마. 뜯긴 흔적 확인하고. 편지는 내가 1차 검열한다.

설아: 야, 그건 사생활 침해…….

김세린: 두 번째. 등하교는 무조건 한나랑 같이 다녀.

옆에서 한나가 팔뚝을 걷어붙이며 씩 웃었다.

최한나: 보디가드 등판.

김세린: 세 번째. 사진 찍히면 나한테 바로 보고. 초상권은 내가 지킨다.

세린이는 어느새 수첩까지 꺼내 들고 있었다.

정보통이 매니저로 전직하는 순간이었다.

[시스템 : 파티원 '김세린'의 직업이 '정보통'에서 '매니저(자칭)'로 변경되었습니다.]

민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민지: 근데 설아야… 괜찮아? 갑자기 이렇게 유명해져서.

설아: 괜찮긴. 피곤해 죽겠다.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36년 인생, 유명세라곤 격투기 잡지 한 귀퉁이에 실려본 게 전부인 남자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여고생들의 "언니" 소리와 남고생들의 힐끔거림을 동시에 받게 생겼다.

'하느님. 벼락은 한 번이면 족하지 않았습니까.'

쉬는 시간마다 복도 창문에 얼굴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타반은 물론이고 1학년, 3학년까지 원정을 왔다.

"저기야, 저기. 창가 자리."

"자는데? 자는 것도 예쁘네."

"야 튀어, 최한나 온다!"

한나가 창가로 어슬렁 걸어가기만 해도 구경꾼들이 흩어졌다.

탱커의 위엄이었다.

그리고 시작됐다.

올 것이 왔다.

[고백 러시]다.

첫 타자는 2교시 쉬는 시간. 3학년 선배였다.

꽃다발을 들고 우리 교실까지 내려온 패기는 인정한다.

"백설아! 나랑 사귀어줘! 첫눈에 반했다!"

교실이 술렁였다. 세린이가 수첩을 꺼냈다.

나는 꽃다발을 물끄러미 봤다. 장미다. 못해도 5만 원어치.

설아: 선배.

"어, 어!"

설아: 이 꽃, 어차피 사흘이면 시들어요. 근데 이 돈이면 보육원 애들 치킨이 다섯 마리예요.

"……네?"

설아: 마음만 받을게요. 꽃은 환불하시고, 그 돈으로 좋은 일 하세요. 그럼 이만.

선배는 꽃다발을 든 채로 얼어붙었다.

세린이가 수첩에 뭔가 적었다.

김세린: 거절 유형 1번. '보육원 치킨'. 채점… 10점 만점에 8점. 감동인데 좀 아저씨 같아.

설아: 채점하지 마.

두 번째는 점심시간. 편지였다.

2학년 옆 반 남학생이 부들부들 떨며 편지를 내밀고 도망갔다.

세린이의 1차 검열을 거쳐(뜯지는 않았다, 흔들어만 봤다) 읽어봤다.

[설아에게.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내 심장은 널 향해 뛰고 있었어. 나의 이 마음이 너에게 다다랐으면 좋겠어. 우리 사겨줄래?]

설아: ……사겨.

나는 볼펜을 꺼냈다.

사귀어. '사겨'가 아니라 '사귀어'. 그리고 '다다랐으면'보다는 '닿았으면'이 자연스럽다.

빨간 펜으로 교정을 봐서, 세린이 편에 돌려보냈다.

맨 아래에 한 줄 적어서.

[마음은 고맙다. 근데 국어 공부 먼저 하자. 대학 가야지. - 백설아]

세린이가 편지를 배달하고 돌아와서 보고했다.

김세린: 걔 지금 편지 껴안고 울어. 근데 웃으면서 울어. '여신님이 첨삭해 주셨다'고.

설아: ……요즘 애들 멘탈은 진짜 못 당하겠다.

김세린: 채점. 거절 유형 2번, '빨간 펜'. 9점. 잔인한데 교육적이야.

세 번째가 제일 골치 아팠다.

방과 후, 옥상으로 불려 갔다.

쪽지에는 [옥상에서 기다리겠다. 안 오면 계속 기다리겠다]라고 적혀 있었다.

안 가면 밤새 기다릴 기세라 어쩔 수 없이 올라갔다.

축구부 주장이라는 3학년이 벽에 기대서 있었다. 소년만화 흉내는 다 냈다.

"왔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랑 사귀자. 나 이래 봬도 이 학교에서……."

설아: 선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설아: 여기 CCTV 없죠?

"어? 어… 없지. 그래서 부른 건데."

설아: 저 심장병 있는 거 아시죠? 작년에 세 번 멈췄어요.

"……그, 그런데?"

설아: 이런 데서 갑자기 고백받고 심장 떨리면, 저 쓰러져요. 그럼 선배는 CCTV도 없는 옥상에서 여학생 쓰러뜨린 사람이 되는 거예요. 뉴스 나오겠죠? '축구부 주장, 옥상에서……'

"미,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다!"

선배는 90도로 사과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계단참에 숨어서 다 듣고 있던 세린이가 수첩을 접으며 나왔다.

김세린: 거절 유형 3번, '심장병 협박'. 10점. 완벽해. 근데 너 그 심장병 카드, 혜진이한테도 썼잖아. 남발하면 약발 떨어진다?

설아: 효과 좋은 약은 원래 아껴 쓰는 거야.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자, 불똥이 엉뚱한 데로 튀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그 영상에는 나만 찍힌 게 아니다.

내가 몸을 던져 구한 상대, 백유리도 같이 찍혔다.

'여신이 목숨 걸고 구한 동생'.

스토리가 얹어지니 유리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댓글마다 "동생도 예쁘던데?", "자매 서사 무엇" 소리가 달렸단다.

그리고 남학생들 사이에 새로운 전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신은 무리다. 하지만 동생이라면…….'

백유리.

여신이 제 몸으로 감싼 동생이자, 그 자체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미모. 게다가 똑같은 백산그룹 딸.

유리 책상에도 조공과 편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유리는 콧대를 세웠다.

유리: 흥. 나도 원래 인기 있었거든? 언니 후광 아니거든?

도도하게 편지를 받아 드는 폼이, 어디서 많이 본 여왕님 흉내다.

하지만 그 콧대는 정확히 사흘 만에 무너졌다.

고백의 절반이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유리야, 너희 언니는 무슨 선물 좋아해?"

"저기, 유리야. 너랑 친해지면… 너희 언니랑도 밥 먹을 수 있는 거지?"

동생을 사다리로 쓰려는 놈들.

멀리서 지켜보던 내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저건 선을 넘었지.

아저씨가 참교육 하러 일어서려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리가 먼저 폭발했으니까.

유리: 야.

편지를 든 남학생 앞에서, 유리가 팔짱을 끼고 또박또박 말했다.

유리: 너 지금 나한테 고백하는 거야, 우리 언니한테 다리 놓는 거야?

남학생: 어? 그, 그게…….

유리: 전자면 진심 담아서 다시 와. 후자면 꺼져. 우리 언니는 너 같은 애 채점표에 올리지도 않아.

남학생은 편지를 든 채로 증발했다.

나는 턱을 괴고 그 광경을 감상했다.

'우리 언니'란다, '우리 언니'.

본인은 눈치 못 챈 것 같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나왔다.

세린이는 그날로 수첩을 한 권 더 팠다.

표지에 [백씨 자매 공용 채점표]라고 적혀 있었다.

김세린: 동생 쪽 거절 유형 1번, '다리 절단'. 10점. 피가 섞였네, 아주.

설아: 피 안 섞였는데.

김세린: 그럼 밥상이 섞였나 보지.

……그건 좀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교내가 아니었다.

소문은 담장을 넘었다.

며칠 뒤 하교 시간. 교문 밖에 낯선 교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두세 명. 다음 날엔 대여섯. 그다음 날엔 아예 무리를 지어 왔다.

근처 남고 애들이다. 소위 '원정 구경'.

"저기래, 한빛고 여신."

"안경 쓴 애? 에이, 사진이랑 좀……."

"아니야, 잘 봐. 미쳤다니까."

"옆에 쟤가 동생이래. 동생도 장난 아니라던데?"

표적이 둘로 늘었다.

유리가 내 옆에 바짝 붙었다. 도도한 표정은 유지 중인데 걸음이 빨라졌다.

개중 용감한 놈 하나가 다가와 폰을 내밀었다.

"저기, 나 옆 학교 다니는데. 번호 좀……."

그 옆의 놈은 유리 쪽으로 붙었다.

"너 백유리 맞지? 나 SNS에서……."

그 순간이었다.

스르륵.

교문 앞에 대기 중이던 검은 세단의 창문이 내려갔다.

최 실장이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

그게 다였다.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그냥 선글라스를 벗고, 그 눈으로 한 번 봤을 뿐이다.

"……저, 저희는 그냥…… 길을 물어보려고……."

두 놈은 나란히 뒷걸음질로 사라졌고, 원정대는 그날부로 반으로 줄었다.

차에 타자 최 실장이 시동을 걸며 물었다.

최 실장: 둘 다 잘 들어라.

설아: 네.

유리: ……네.

최 실장: 아버지께 말해 주랴, 말아 주랴.

설아: 말아 주세요.

유리: 말아 주세요!

모처럼 자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졌다.

최 실장: 그럼 다음 주부터 하교 5분 일찍 나와라. 쟤들 오기 전에 뜨자.

설아: ……감사합니다.

역시 프로다.

집이라고 조용한 건 아니었다.

저녁 식탁. 이모가 싱글벙글하며 반찬을 내려놓았다.

이모: 우리 설아가 그렇게 유명해졌다며? 서진 언니가 그러던데, 인터넷에 사진도 돌고!

설아: ……그 얘긴 그만.

이모: 아휴, 왜~ 예쁜 게 죄니? 나 같으면 자랑하고 다니겠다.

신문을 보던 아버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백도훈: ……사진이 돈다고?

아, 이런.

설아: 학교 애들끼리요. 별거 아니에요.

백도훈: 최 실장.

문가에 서 있던 최 실장이 대답했다.

최 실장: 이미 조치 중입니다. 두 분 다요. 초상권 침해 게시물은 법무팀이 순차적으로 내리고 있고, 등하교 동선도 조정했습니다.

설아: ……법무팀이요?!

내가 놀라서 되묻자, 아버지는 신문을 넘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백도훈: 내 딸들 얼굴이 아무 데나 돌아다니는 건 못 본다.

딸들.

복수형이었다.

옆에서 샐러드를 뒤적이던 유리의 포크가 멈췄다.

유리: ……나도요?

백도훈: 그럼 넌 내 딸 아니냐.

아버지는 그 말을 세상에서 제일 당연한 소리처럼 하고는 신문으로 돌아갔다.

유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귓불이 빨갰다.

데려온 딸로 십 년을 산 애가, '내 딸들'이라는 말에 데인 거다.

새엄마가 와인잔 너머로 아버지를 잠깐 바라봤다. 그 눈빛이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과잉보호인지 츤데레인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세린이의 밤샘 노동은 끝났다.

세린이는 나중에 이 얘기를 듣고 진심으로 분해했다.

김세린: 법무팀이라니… 반칙이야. 내 매니저 커리어 첫 업적이었는데.

그렇게 폭풍 같은 2주가 지났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대참사 이후의 학교생활은, 생각보다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게 정리되어 갔다.

이유는 단순했다.

격차가 너무 커져 버리면, 아예 접근조차 못 하는 법이니까.

그날 운동장에서 '여신 강림'을 목격한 남학생들은 나를 무슨 '성역' 모시듯 했다.

먼발치에서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내 앞에서 얼굴이 빨개져서 쭈뼛거리며 길을 터주는 정도였다.

유리 쪽도 정리됐다. '백유리한테 언니 얘기 꺼내면 사회적으로 사망한다'는 학칙 아닌 학칙이 생겼다.

그리고 어느샌가, 소문의 제목이 바뀌어 있었다.

'한빛고에 여신 있음'이 아니라.

'백산그룹의 두 여신'.

성까지 붙었다. 이젠 어느 집 딸인지까지 다 아는 거다.

유리는 '여신의 동생'이 아니라 '두 여신'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유리: 누가 둘째래? 내가 왜 둘째야?

본인은 발끈했지만, 그날 밤 자기 방에서 그 게시글을 캡처하는 걸 서진 언니가 봤다고 한다.

세린이는 수첩 표지를 고쳐 썼다. [백씨 자매 공용 채점표]에서 [쌍여신 매니지먼트]로.

김세린: 사업 확장이야. 불만 있어?

없다. 어차피 말려도 할 거잖아.

고백 러시도 잦아들었다. 세린이의 채점표가 학교에 유출된 게 컸다.

'백설아에게 고백하면 유형별로 채점당한다'는 소문은, 웬만한 철벽보다 효과가 좋았다.

(유출한 게 세린이 본인이라는 건 안 비밀이다. "이게 매니지먼트야"라고 하더라.)

게다가 이미 피구 대참사로 내 몸이 어떤지 전교에 생중계됐지만, 나는 여전히 [검은 뿔테 안경 2호기 + 두 치수 큰 펑퍼짐한 교복] 조합을 고수하고 있었다.

한 번 보여줬으면 됐지, 매일 광고판처럼 다니는 건 내 정서에 안 맞는다.

김세린: 야, 백설아. 너 그거 진짜 죄악이야.

세린이는 나를 볼 때마다 가슴을 쳤다.

김세린: 국가적 손실이라고! 그 얼굴, 그 몸매를 저 포대 자루에 가두다니! 미모는 뽐낼수록 국력이 되는 법인데! 안경이라도 좀 벗어!

세린이가 내 안경을 벗기려고 달려들었지만, 나는 가볍게 피하며 혀를 찼다.

설아: 시끄러. 학생은 단정한 게 최고야.

김세린: 으악! 저 유교걸 마인드! 꼰대야, 완전!

세린이의 잔소리는 BGM처럼 흘려들었다.

나 먹고살기도 바쁜데 꾸밀 시간이 어디 있어.

그리고 그 소란이 가라앉을 때쯤, 중간고사 시즌이 시작되면서 우리 파티도 수다 떨 여유가 사라졌다.

"설아, 이것 좀 알려줘!"

"야, 물리 범위 어디까지야?"

쉬는 시간마다 내 자리는 '백설아 과외방'으로 풀가동됐다.

심지어 공부라곤 담쌓았던 한나까지 내 옆에 붙어서 벼락치기를 했다.

그리고 의외의 복병, 백유리.

녀석은 도서관에서도, 집에서도 내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야, 이거 어떻게 푸는 거야?"라며 묻는데,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언니한테 질 수 없다'는 승부욕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겨울방학 윤 선생 과외 때부터 쌓아 온 그 승부욕이다.

대한민국 사립고의 시험 기간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학교 전체가 절간처럼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 절간 같은 학교에서, 뜻밖의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피구장의 그 남자. 야구부 점퍼를 입고, 세상 비장한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