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피구 대참사
von 외인 · 2026-10-07
5월의 햇살이 내리꽂히는 운동장.
아직 5월인데도 제법 더웠다.
2반과 3반의 합동 체육 시간. 종목은 피구.
나는 스탠드 그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내 옆에는 유리, 민지, 세린, 한나까지 내 파티원들이 쪼르르 앉아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 여야 했다.
하지만 내 눈은 매섭게 운동장을 훑고 있었다.
김세린: 야, 분위기 좀 쎄하지 않냐?
세린이가 혀를 찼다.
상대편인 2반 코트.
그곳엔 박혜진 패거리뿐만 아니라, 덩치 큰 남학생 몇 명이 섞여 있었다.
합동 수업이라 남녀 혼성 게임이었다.
문제는 저 남학생들이다.
2반의 이진성. 야구부 투수 출신이다.
성격 더럽기로 유명하고, 박혜진이랑 썸 탄다는 소문이 있는 놈.
퍼억!
"꺄아악!"
이진성이 던진 공이 우리 반 여학생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공 소리가 다르다.
피구 공이 아니라 무슨 돌덩이를 던지는 소리가 난다.
최한나: 미친… 저게 피구야? 살인무기지.
한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게임이 아니다. 사냥이다.
박혜진이 이진성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리고 힐끔, 우리 쪽 스탠드를 올려다봤다.
정확히는 백유리를.
내 안의 [위기 감지 센서]가 붉은 불을 켰다.
'노리는구나.'
그때,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선생님: 자, 선수 교체! 3반, 인원 부족하니까 스탠드에 있는 학생들 들어와!
하필이면 우리 반 아이들이 줄줄이 아웃당해서 인원이 비었다.
유리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유리: 나… 나가야 될 것 같아.
설아: 야, 백유리. 나가지 마. 저것들 노리고 있어.
내가 말렸지만,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유리: 점수 깎이면 안 돼. 살살 하다가 금방 아웃돼서 나올게.
유리는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나는 먹던 아이스크림 막대를 우드득 씹어 부러뜨렸다.
불길하다.
경기가 재개되었다.
유리는 최대한 구석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사냥개들은 집요했다.
박혜진이 공을 잡았다. 그리고 이진성에게 패스했다.
이진성은 공을 받아 들고, 씩 웃으며 어깨를 풀었다.
그가 서 있는 위치는 엔드 라인 바로 앞. 유리와의 거리는 불과 5미터.
유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이진성: 야! 백유리! 선물이다!
박혜진이 비릿하게 웃으며 이진성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진성이 공을 고쳐 잡았다.
목표는 유리의 몸통.
혼성 피구 규정에서 남학생은 여학생 얼굴로 공격하면 안 된다. 그건 징계감이다.
더구나 이진성의 공은 다른 남학생 공하고 다르다.
굳이 얼굴에 맞출 필요도 없다. 적당히 배나 허벅지만 맞아도 멍이 들 게 뻔하다.
멍 정도는 만들어 줄 생각이겠지.
순간, 운동장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이진성이 와인드업했다.
장난이 아니다. 야구부 에이스다운 전력투구 폼이다.
내 안에서 위기 감지 센서가 온통 빨간 불을 켠다.
가만히 있으면 큰일 날 분위기다.
획-!
공을 뿌리는 순간, 이진성의 표정이 구겨졌다.
야구공이 아닌 피구공. 제구가 빗나갔다.
타핫!
동시에 나도 땅을 박찼다.
이진성: ……어?!
이진성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힘이 너무 실렸다.
손끝에서 긁힌 공이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휘어졌다.
목표는 몸통이었으나, 제어를 잃은 공은 유리의 안면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위험해.'
살벌한 흉기는 아니더라도, 체격 건장한 남학생이 전력으로 던진 피구 공이다.
더구나 야구부 투수가 던진 공이라면 그건 이미 흉기다.
정통으로 맞는다면 코피가 터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잘못하면 안와골절 같은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
유리는 날아오는 공의 기세에 질려버린 듯했다.
그저 눈만 크게 뜬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버렸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상태다.
'거리가 멀어. 그냥 뛰어서는 늦는다.'
내 시야에 벤치에 앉아 경기를 구경하던 태양이의 다리가 들어왔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설아: 강태양! 다리에 힘 꽉 줘!
다급하게 소리치며 태양이의 허벅지 위로 발을 올렸다.
강태양: 어? 으, 으엇?!
얼떨결에 내 고함에 반응한 태양이가 반사적으로 다리 근육을 딱딱하게 굳히는 게 느껴졌다.
역시 운동선수라 반응이 빠르다.
[시스템 : 위기 감지. 순간 가속 보정.]
태양이의 단단한 허벅지를 도약대 삼아 힘차게 땅을 박찼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내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코트 안으로 쇄도했다.
슈우우웅!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공이 유리의 코앞까지 닥쳤다.
유리: 꺄악!
민지가 비명을 지르고, 유리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내 몸이 유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정면으로 받아내기엔 공의 회전이 너무 거세다.
무리하게 잡다간 손가락 인대가 늘어날 수도 있다.
'받는 게 아니라, 흘린다.'
내 오른손이 부드럽게 뻗어나가 공의 측면을 감아쥐었다.
퍼-억!
묵직한 충격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손이 얼얼해지는 통증.
하지만 나는 공을 잡은 손을 뒤로 쭉 빼며 회전력을 죽였다.
야구의 포구 동작과 유도의 낙법을 섞은, 충격 완화 기술이었다.
그 탄력을 이용해 나는 공을 품에 안은 채 그대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쿠당탕!
바닥을 한 바퀴 굴렀지만, 붙어버린 가속도는 쉽게 죽지 않았다.
데굴데굴 구른 내 몸은 코트 라인을 벗어나, 응원석 옆에 놓여 있던 급수대(물통 테이블)를 향해 돌진했다.
와장창! 우르르르!
설아: 크윽…!
테이블 다리와 어깨가 충돌하며 요란한 소음이 운동장을 울렸다.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생수병과 종이컵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며 내 몸을 덮쳤다.
차가운 물벼락이 쏟아지고 나서야, 거칠었던 움직임이 겨우 멈췄다.
설아: …….
"……."
운동장에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공을 던진 이진성은 사색이 되었고, 박혜진도 입을 틀어막았다.
사고다. 이건 진짜 큰 사고가 날 뻔했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물통 더미 속에서 누군가가 꿈틀거렸다.
설아: ……후우.
거친 숨소리. 나였다.
나는 젖은 몸을 일으켰다.
내 오른손에는, 이진성이 던진 공이 찌그러질 정도로 꽉 쥐여 있었다.
유리: ……설아 언니?
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야, 이럴 때만 언니지? 쫄기는.'
나는 대답 대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코와 입으로 이온 음료의 단내가 훅 끼쳤다.
찝찝해 죽겠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충격으로 인해 내 미모 봉인구였던 검은 뿔테 안경은 이미 박살 나 저 멀리 날아간 상태였다.
운동장엔 오직 정적만이 흘렀다.
공을 던진 이진성은 투구 폼 그대로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고, 박혜진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스으읍.
나는 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순간, 5월의 뜨거운 햇살이 젖은 내 얼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설아: ……하아.
안경이라는 가림막이 사라진 맨얼굴.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백설아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물기를 머금어 투명하게 빛나는 백옥 같은 피부. 날카로우면서도 처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슴 같은 눈망울.
물에 젖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듯했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그 아래였다.
내 몸보다 두 치수 크게 입었던 헐렁한 칠부 체육복 상의.
평소엔 펑퍼짐한 포대 자루 같던 그 옷이, 물과 땀에 흠뻑 젖자 돌변했다.
마치 진공 포장이라도 한 것처럼, 내 몸의 실루엣에 완벽하게 달라붙어 버린 것이다.
"……미, 미친."
누군가 신음처럼 내뱉었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 되었다.
그동안 헐렁한 옷 속에 철저히 은폐·엄폐되어 있던, 지난겨울 김철수의 지옥 트레이닝으로 빚어낸 압도적인 피지컬이 드러났다.
이건 반칙 수준이었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라인. 젖은 바지는 다리에 달라붙어, 매일 새벽 스쿼트로 다져진 탄탄한 하체 라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가냘픈 병약 미소녀? 아니다.
이건 야수다.
군살 하나 없이 전투 근육으로 꽉 찬, 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아마조네스 전사가 강림한 것이다.
청순한 얼굴에, 폭력적인 몸매.
이 비현실적인 [갭 차이]에 운동장에 있던 전교생의 뇌 정지가 왔다.
남학생들은 단체로 숨 쉬는 법을 까먹은 듯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여기저기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녀석들이 속출했다.
심지어 공을 던졌던 이진성조차 죄책감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이 시뻘게져서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질투? 아니, 이건 질투의 영역을 넘어선 동경이었다.
세린이는 입을 틀어막은 채 휴대폰 카메라를 켰고, 한나는 멍하니 "와… 언니, 날 가져요…"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이 뜨거운 시선들이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오, 씨. 옷이 왜 이렇게 들러붙어. 숨 막히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공을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패대기쳤다.
쾅!
그리고 젖은 체육복 상의 지퍼를 잡았다.
공기 좀 통하게 하려고. 단지 그뿐이었다.
지이익.
그 나른하고 단순한 동작 하나에, 운동장의 온도가 5도는 올라갔다.
지퍼가 내려가며 쇄골 라인과 목선이 살짝 드러나자, 마치 댐이 무너지듯 여기저기서 신음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억!"
"미쳤다, 진짜…."
엉거주춤 일어나 나를 쫓아오려 했던 강태양은?
녀석은 코피를 주르륵 흘리며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미 영혼은 가출한 상태였다.
강태양: 사… 사부님… 아니, 누님…….
내 안의 36세 아저씨, 김철수가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했다.
'아… X됐다.'
'망할 근손실 따위랑 비교도 안 되는 대형 사고가 터져버렸네.'
나의 평화롭던(혹은 그렇다고 믿었던) 학교생활은, 이 짜릿하고 강렬한 비주얼 쇼크와 함께 오늘부로 완전히, 그리고 아주 화려하게 박살 나버렸다.
그날 밤, 세린이가 보낸 메시지가 상황을 요약해 줬다.
[속보. 너 전교 남학생 단톡방 프사 됨. 축하해, 여신님.]
……하느님. 저 그냥 안경 하나 더 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