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 봉인
von 외인 · 2026-09-02
폭풍 같은 겨울방학이 끝난 2월 말.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가, 내 눈을 의심했다.
설아: ……이게 나라고?
3개월 전, 퇴원할 때만 해도 툭 치면 부러질 것 같던 종이 인형 백설아는 사라졌다.
트레이너 김철수의 눈으로 스캔해 봤다.
체지방률, 대략 18%. 골격근량은 3개월 전의 두 배. 새벽마다 정원 열 바퀴, 스쿼트 200개, 그리고 이모가 꾸역꾸역 밀어 넣은 보양식의 콜라보.
키도 3cm는 더 컸다. 가뜩이나 작지 않은 키였는데, 그야말로 '늘씬'해졌다.
원래 설아가 가진 백옥처럼 하얀 피부와 청순가련한 얼굴은 그대로다.
그런데 그 아래가 반전이다. 청순한 얼굴에, 운동선수의 몸.
설아: 와… 내가 만들었지만 이건 좀 예술인데?
트레이너 본능이 흐뭇해하며 포즈를 취해보던 찰나.
나는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설아: 잠깐. 며칠 있음 나 개학이지.
나는 옷장에서 1학년 때 입던 교복을 꺼냈다.
그리고 팔을 넣는 순간.
설아: ……어?
블라우스가 비명을 질렀다.
단추를 잠그려는데 어깨와 등이 팽팽하게 당겨져서 터질 것 같다. 턱걸이로 키운 광배근이 문제다.
더 가관인 건 치마였다.
키가 크고 골반이 넓어지면서, 치마가 쑥 올라가 버렸다. 이건 치마가 아니라 거의 벨트 수준이다.
설아: …….
거울을 봤다. 교복 모델? 아니, 이건 무슨 무대 의상이다.
숨만 쉬어도 단추가 날아갈 것 같고, 걸을 때마다 몸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설아: 미친! 이러고 학교를 어떻게 가!
내 영혼은 36세 보수적인 아저씨다.
이 꼴로 남녀공학 학교에 간다? 사춘기 남고생들의 쓸데없는 관심을 한 몸에 받겠다는 소리다.
번호 따기? 고백 러시?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설아: 안 돼. 절대 안 돼. 내 몸은 내가 지킨다.
나는 즉시 방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설아: 이모! 차 대기시켜요! 교복점 가야 해요!
이모: 어머, 설아야 왜? 교복 있잖아?
설아: 작아요!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요!
나는 이모를 질질 끌고 백화점 교복 매장으로 달려갔다.
매장 직원 언니가 나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점원: 어머, 학생 몸매가 너무 예쁘다~ 요즘은 핏되게 입는 게 유행이야. 자, 이거 입어봐.
직원이 건넨 '슬림핏' 교복. 입어봤다.
……젠장. 너무 잘 맞는다. 너무 예쁘다. 그게 문제다.
이모와 매장 언니가 물개박수를 쳤다.
이모: 어머나! 세상에! 인형이네, 인형이야! 이걸로 하자!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설아: 아니요. 벗을게요.
이모: 왜? 너무 예쁜데!
설아: 불편해요. 공부할 때 피 안 통해요.
나는 직원 언니에게 비장하게 말했다.
설아: 언니. 여기서 제일 큰 거 주세요.
이모: 응? 큰 거?
설아: 네. 남자 사이즈로 줘도 돼요. 헐렁한 거. 아주 박시한 걸로요.
직원과 이모는 경악했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나는 내 몸보다 두 치수나 큰 헐렁한 블라우스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펑퍼짐한 치마를 샀다.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나왔다.
거울 속에선 몸매라곤 찾아볼 수 없는, 펑퍼짐한 포대 자루를 뒤집어쓴 학생이 서 있었다.
설아: 후우… 이제 좀 안심이네.
미모 봉인 완료.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얼굴이 너무… 튄다.
아무리 옷으로 가려도, 이 천사 같은 이목구비가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설아: 이모. 저 안경도 맞출래요.
이모: 안경? 너 눈 좋잖아?
설아: 공부하다 보니 눈이 좀 침침해져서요. 그리고… 안경 쓰면 더 모범생 같잖아요.
나는 바로 옆 안경점으로 직행했다.
진열대에서 가장 두껍고, 가장 투박하고, 얼굴을 가장 많이 가리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집어 들었다.
도수는 하나도 없는 알로.
착용 완료.
거울을 봤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뿔테 안경. 몸매를 완벽히 은폐한 펑퍼짐한 교복.
내 몸이라 그런가, 그래도 예뻐 보인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좋다.
[시스템 : '백설아'의 매력도가 -50 감소했습니다.]
[시스템 : '모범생 위장'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완벽하다. 누가 봐도 '공부만 파는 너드'다.
이 정도면 남학생들의 관심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
설아: 좋아. 이 상태로 등교한다.
이모는 "아이고, 그 예쁜 얼굴을 왜 가려…" 하고 울상이었지만, 나는 개선장군처럼 뿔테 안경을 치켜올렸다.
이건 패션 테러가 아니다. 생존 전략이다.
* * *
등교일.
헐렁한 새 교복을 꺼내 입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썼다.
설아: 흐음… 그래도 미모가 자꾸 튀어나오네.
운동으로 꽉 잡힌 몸은 가렸는데 매끄럽고 하얀 피부는 감출 방법이 없다. 이 정도로 만족할밖에.
이제 메인 스테이지로 갈 시간이다.
새엄마가 맞춰준-난 이름을 잘 모르는-명품 가방을 메고, 아빠가 사준 한정판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지옥에서 돌아온 아저씨 소녀, 백설아가 간다.
검은 세단 뒷좌석.
나와 백유리는 양 끝에 딱 붙어 앉아 있었다.
겨울방학 동안의 라면과 생강차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츤데레 아가씨와 손잡고 붙어 앉아 갈 정도로 친해지진 못한 것 같다.
백유리가 내 모습을 보고 내뱉은 첫 마디.
유리: ……헐!
그러곤 말이 없다.
차 안의 공기가 무겁다 못해 액체로 변해 찰랑거릴 지경이다.
이 아가씨, 뭐가 불안한지 구석에서 손가락만 꼼지락 꼼지락. 그러다 교문 입구에 이를 쯤 내게 말을 붙였다.
유리: ……야, 백설아.
설아: 어?
유리가 창밖을 보며 툭 던졌다.
유리: 학교 가면, 나 아는 척하지 마.
오호라. 일진 놀이하는 동생의 귀여운 경고인가?
설아: 왜? 언니가 창피해서?
유리: ……응.
유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았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눈치인데, 그냥 삼킨다.
'너 같은 아싸랑 엮이면 내 평판 떨어져'라는 말을 돌려하는 거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설아: 걱정 마라. 나도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쁘다. 네 친구들한테 굳이 인사 안 해.
유리는 의외라는 듯 나를 힐끔 쳐다봤다.
유리: ……정말 이상해졌어. 백설아 같지가 않아. 그리고 뜬금없이 그 안경은 뭐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이어폰을 꽂아버렸다.
츳. 물어봤으면 대답을 기다려야지.
하지만 뭐, 궁색한 변명하지 않아도 되니 고맙긴 하다.
근데 유리 너… 손톱 뜯고 있네?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인데.
학교 가는 게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얘.
운전석에서 최 실장이 백미러로 우리를 힐끔 봤다.
최 실장: 둘 다, 점심 굶지 마라. 내가 이모한테 혼난다.
유리: 네에.
설아: ……예.
대답은 둘 다 했다. 방향은 정반대 창문이었지만.
드르륵.
교실 문을 열었다.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순식간에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조용해졌다.
설아: …….
…….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반가움? 걱정? 아니다.
'어? 쟤 또 왔네?' 혹은 '살아있었어?' 정도의 무관심한 호기심.
나는 쿨하게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잠깐, 문제가 생겼다.
이 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반 배정이 고정인 시스템이었다. 입시 명문고들 중에 학업 분위기 조성을 핑계로 3년 내내 같은 반을 유지하는 곳이 있다더니, 여기가 딱 그 짝이다.
덕분에 아이들은 개학 첫날인데도 망설임 없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는데. 문제는 나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는 거다.
'…내 자리가 어디더라?'
설아의 기억이 전무하니, 내 자리가 창가 명당인지 복도 쪽 구석인지 알 길이 있나.
멀뚱히 서 있다간 선생님 들어오실 때까지 벌 서는 꼴이 될 판이다.
결국 등교 10분 만에 유리와의 '아는 척 금지' 조약을 파기하게 생겼다.
죽기보다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쪽팔림은 한순간이고 자리는 1년이다.
나는 쭈뼛거리며 짐짓 모르는 척, 유리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설아: 야, 근데 내 자리가 어디였지?
유리가 이어폰을 낀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 인간이 진짜 미쳤나?' 하는 표정.
곧이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더니, 턱을 들어 대각선 구석을 가리켰다.
오. 맨 뒷줄 창가 자리. 비어 있다.
명당이다. 선생님 시선 사각지대, 햇살 잘 들어오고, 자거나 딴생각하기 딱 좋은 [주인공 전용석].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아이들은 흥미를 잃고 다시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완벽한 [투명 인간]이었다.
'은따'도 아니고 그냥 이산화탄소 취급.
설아: 차라리 편하네.
나는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그런데 앞문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박혜진: 야, 백유리! 왔어?
교복 치마를 한껏 줄여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한 여학생 셋이 유리에게 다가갔다.
옆 반 애들이다. 쉬는 시간도 아닌데 남의 반 교실에 제집처럼 들어온다.
유리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내, 연기 톤으로 생글거리며 웃었다.
유리: 어, 왔어.
박혜진: 너 오늘 그거 가져왔어? 그 한정판 틴트.
유리: 아… 응. 여기.
유리가 가방에서 포장도 안 뜯은 명품 화장품을 꺼내 건넸다.
그러자 무리의 리더 격인 여자애-이름표에 박혜진이라고 써 있다-가 유리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박혜진: 역시 우리 유리밖에 없다니까~ 오늘 매점도 쏠 거지?
유리: ……응, 당연하지.
나는 턱을 괴고 그 장면을 지켜봤다.
내 눈은 못 속인다.
저건 친구가 아니다.
[관계 분석 : 호구와 포식자들]
유리는 저 무리에 끼고 싶어서, 혹은 미움받기 싫어서 자진해서 '지갑' 노릇을 하고 있는 거다.
겉으로는 '유리랑 친한 무리'지만, 실상은 유리가 쟤네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
'쯧쯧. 집에서는 그렇게 여우같이 굴더니, 밖에선 곰이었냐?'
동생의 흑역사를 목격한 기분이다.
아까 차 안에서 손톱을 뜯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아는 척하지 마"가 아니라 "이 꼴을 보지 마"였던 거다.
도와줄까?
아니, 아직은 때가 아니다.
섣불리 나섰다간 역효과만 난다. 저 녀석 자존심에, 언니가 끼어드는 순간 더 꼬인다.
일단 관망.
나는 교과서를 펼치고, 뿔테 안경을 치켜올렸다.
투명 인간에겐 투명 인간의 장점이 있다.
아무도 나를 안 보니까, 나는 모두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