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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널 비추지 않아. 기억할 뿐.

von 제이여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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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란 무엇인가. 질문에 그림자는 사람이 믿고 싶은 거짓이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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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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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지금까지 믿고 있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새로운 게 들이차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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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마저도 덤덤히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는 상당히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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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하던 그때.

​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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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어보니 기록부 여자 선배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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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치안부 첫번째 견학이지?”

“네.”

“넌 기록부로 와.”

​

크리스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밀리아님의 명령이야. 앞으로 모든 견학을 무시하고 기록부에서 쭉 일하래. 축하한다. 정식 궁인이 되었구나.”

​

여자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 밖으로 나갔다.

​

크리스는 아무 말 없이 멍하게 자리에 서 있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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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뭐? 기록부 정식 궁인이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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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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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뺨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이렇게나 빨리? 난 아직 견학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나저나 너 말이야. 조용히 못 해? 목소리 진짜 크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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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는 목을 가다듬고 몸을 낮췄다.

​

“무슨 일 있었어?”

“기록장치들이 날 거부하는 것 빼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렇게 들으니까 더 이상한데?”

​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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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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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거울이 깨지고 책이 망가지는데 에밀리아는 왜 자신을 기록부에 넣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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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가 천천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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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황궁은 뭔가를 숨기고 있어.”

“동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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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가 빵을 힘차게 입으로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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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최대한 치안부에 들어갈 테니 넌 기록이나 뒤져봐.”

“얌전히 들어가. 얌전히.”

“뭐어, 노력해볼게.”

​

크리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

일 진척이 너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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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기다렸다는 듯 길이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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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한 걸까? 함정은 아닐까?

​

에밀리아의 정체와 그녀의 의도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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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던 그때,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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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흑발. 정식궁인이 됐다면서?”

“비브. 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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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브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

“에밀리아님한테 뇌물이라도 준 거야?”

“나도 의도를 모르겠어.”

​

이온이 세라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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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조급해지네. 나도 성과를 내야 하는데 말이지.”

“이온은 할 수 있을 거야.”

“비브 넌 성격 좀 죽여라.”

“세라, 네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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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들마. 이온이 천천히 두 사람을 갈라놨다.

​

이온을 천천히 바라보던 크리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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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은 어디 들어가고 싶어?”

“나?”

​

이온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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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받아주는 것만으로 감사하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지. 몰락 귀족 출신 주제에 생글생글 잘 웃고 다닌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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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이온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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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찰나 그의 얼굴에 감정이 비춘 것 같았다.

​

이온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

“운이 좋았을 뿐이야. 마침 황제 폐하께서 은혜를 내려주신 덕분에 궁인이 될 수 있었어.”

​

이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갈게. 우리는 곧 치안부 견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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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조 아이들에게 향하는 이온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세라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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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이 몰락 귀족 출신이었어? 그런데 궁인이 됐네.”

“이번에 시행되는 정책이래. 원래는 노예 신분이지만 모범의 자세를 보이는 노예들에게만 궁인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는 거지. 황제 폐하께선 마음이 너무 여리시다니깐.”

“그럼 비브, 넌 왜 궁인이 된 건데?”

“당연히 관리부 취직이지. 관리부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 알아?”

​

세라와 비브의 말다툼 소리가 이어졌다.

​

크리스는 천천히 스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

부드러운 액체가 입 안에서 뭉개졌다.

​

​

*

​

​

​

일주일 후.

​

크리스는 다시 비장한 각오로 손거울 앞에 섰다.

​

거울을 들고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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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서 있는 궁인들 사이로 긴장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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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의 얼굴이 선명하게 표면에 떠오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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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그어지듯 거울에 금이 가더니 그대로 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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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들 사이에서 탄식과 짜증이 섞인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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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장 났네.”

“벌써 몇 개째지?”

“에밀리아님께선 저런 애를 기록부에 왜 보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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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불이 터지는 건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

왜 기록 장치들이 자신을 거부하는지 알 수 없었고, 에밀리아의 특별 발령도 이해 할 수 없었다.

​

원래라면 이온이나 캐롤리안과 치안부에 견학을 가야 하는 게 맞았지만 에밀리아의 특별 명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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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을 기록부에서 일하게 하라는 이상한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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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다. 넌 서고 청소나 해라. 마침 적임자가 없었는데 딱 나타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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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간부가 쳐다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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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는 저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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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에 걸린 커다란 열쇠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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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괜히 울컥해 여자 선배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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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노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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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선배의 날카로운 말이 크리스를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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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한숨을 내쉬고 창고에서 빗자루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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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는 낡고 폐기 직전인 기록들이 모인 곳이어서 넓은 데다 청소를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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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부 뒷문을 열자 뜰 너머에 낡은 건물 하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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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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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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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여유 부리지 말고 얼른 가서 해. 어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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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의 자물쇠에 열쇠를 넣어 풀자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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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천천히 문을 옆으로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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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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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과 책상에는 책들과 신원 미상의 거울들이 마구잡이로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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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얼마나 정리를 안 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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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어떻게 정리하는지도 안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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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울상을 지으며 일단 널려 있는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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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브러진 종이들과 거울은 한 아름 품에 안고 천천히 정리하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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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에 있던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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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과는 달리 멀쩡한 책이었다.

​

형태가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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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가 천천히 책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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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와 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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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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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레베카의 서재에서 봤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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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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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꿀꺽 삼킨 크리스는 천천히 종잇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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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크리스를 거부하지 않았고 페이지를 넘기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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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아냐, 가계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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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사진이 연달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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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여성, 아이들이 단정한 포즈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

​

사진들은 세 개의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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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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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가지.

​

그리고 먹칠 된 세 번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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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 같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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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페이지엔 한 사람의 사진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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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발에 속눈썹이 긴 어떤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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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남자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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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밑에는 남자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씨가 적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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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아르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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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이 나지막하게 창고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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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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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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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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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디서 본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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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봤다고?”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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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가 황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여자 선배가 크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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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정리하는 법을 안 가르쳐서 왔는데 놀고 있네?”

“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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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선배가 한숨을 푹 내쉬며 책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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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가 책을 황급히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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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구석에 떨어져 있길래 주웠는데⋯⋯.”

“뭐야. 이젠 서고 책들까지 널 거부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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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책을 뺏어가 책 페이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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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백지인데?”

“예? 거부 안하는 것 같은데요. 여기에 사진들 안 보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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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가 페이지를 넘겨 사진이 잔뜩 그려져 있는 페이지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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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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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백지인데 너 뭘 보고 있는 거니? 일하기 싫어서 딴청 피우는 건 아니고?”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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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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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책 거기 놓고 와. 정리하는 법을 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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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천천히 책을 닫고 책상 구석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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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히기 전, 마지막 페이지에 문장 하나가 적히는 것도 모른 채.

​

“운명, 아직 정해지지 않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