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널 비추지 않아. 기억할 뿐.
von 제이여라
08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카산드라가 방에 찾아와 C 그룹 아이들을 깨웠다.
“좋은 아침이야. 이제 일하러 가야지? 아 물론 아직 실습이니 걱정하지 마. 다들 금방 익숙해질 수 있을 거야.”
카산드라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기록소였다. 리에의 말을 빌리자면 기록부라고 했던 곳. 카산드라의 어깨너머로 수많은 거울들과 책들이 놓여 있었다.
“기록부는 아주 중요한 곳이지.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이거든. 여기서는 나라와 황실에 관한 기록을 관리해. 너흰 아직 정식 궁인이 아니니 황실 관련 기억을 볼 순 없겠지만, 잡일을 맡으면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게 될 거야.”
정식 궁인 다섯 명이 다가와 나란히 섰다. 카산드라가 허리 위에 손을 올렸다.
“한 명씩 담당 궁인한테 가면 돼.”
크리스의 앞으로 자주색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 궁인이 섰다. 크리스가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자 궁인이 아래층으로 크리스를 이끌었다.
“나는 기록 중에서도 신문부를 맡고 있어. 나라에 일어나는 큰 일들을 기록하고 유지하며 시민들에게 알리지. 바쁘게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나라의 귀나 다름 없는 곳이니까.”
“알겠습니다.”
“책과 거울에도 종류가 있다는 거 알아?”
“궁인 거울이랑⋯⋯.”
여자 궁인이 책 한 권을 꺼냈다. 백지로 가득한 책이었다.
“자동기록 공식이 들어간 책이야. 인간은 세계라는 말 알지?”
“네.”
“그것에 따라 세계의 귀에 들어온 큰 사건들을 기록하지. 물론 이건 실습용이지만. 우리는 그 사건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해.”
크리스가 귀를 만지작거렸다. 여자 궁인이 덧붙였다.
“아, 참고로 기록된 건 숨길 수 있어도 지울 수 없어.”
“⋯⋯네?”
궁인이 웃으며 말했다.
“눈으로 기록된 걸 어떻게 지워. 이미 세계에 기록된 거라서 사라질 수 없어. 낡아서 폐기 처분 할 순 있겠지만. 자, 한번 해봐. 널 인식할 거야.”
크리스는 책을 받았다. 백지가 일렁이더니 글씨가 써지기 시작했다.
“어라?”
여자 궁인과 크리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인식 불가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상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잘 됐는데.”
크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거울부터 책까지 기억 장치들이 전부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순간 다시 귓가에 잡음이 들렸다.
“잊어⋯⋯.”
크리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억은 전부 다 기록된다. 그런데 그렇게 정밀한 장치들이 자신에게만 작동하지 않는다. 마치 뭔가를 숨기듯이. 크리스의 이마 위로 핏줄이 솟았다.
“하여튼 오늘 할 일은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분류해볼 거야. 뭐 아주 사소한 사건들 같은 거 말이지. 오늘은 이것만 해보자.”
그렇게 책과 거울 더미에 앉게 된 크리스. 각 책과 거울마다 담당 지역이 있다. 모 사과 농장에서 사과 수확이 되지 않았다던가, 학교에서 싸움이 났다던가 이런 작은 일들이 기록되고 있었다. 크리스는 일의 중요도에 따라 능숙하게 기록들을 분류했다.
“오, 잘하는데? 인재네, 인재.”
그렇게 기록을 분류하기 1시간, 여자 궁인이 호출로 인해 자리를 비웠다. 크리스는 여자 궁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기록을 뒤로 밀었다. 자신이 황궁에 들어오기 전, 옛날 기억을 볼 생각이었다.
“⋯⋯.”
첫 번째 장엔 어떤 살인마가 잡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두 번째 장엔 몽인들의 시위 이야기가 적혔다. 세 번째 장을 펼쳤을 때, 크리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야.”
파란 하늘, 금빛 밀밭. 의미도 없는 말들이 가득 종이를 채우고 있었다. 다른 책도 이 시기에만 이상한 단어들이 새까맣게 페이지를 뒤덮었다. 마치 무언갈 가리고 있는 듯한.
“대체⋯⋯.”
크리스가 페이지를 만지작거릴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크리스는 능숙하게 책을 숨겼다.
“잘하고 있어?”
“네.”
“벌써 여기까지 한 거야? 넌 기록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크리스가 물었다.
“선배님. 기억 오류도 있나요?”
“기억 오류라니?”
“이상한 단어만 적혀 있는 페이지가 있어서요.”
궁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오염된 건가?”
그 말을 듣고 크리스는 확신했다.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숨겨놨다는 걸.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다. 정식 궁인이 되어 기록에 정식으로 다가가는 것.
“선배님. 저 기록부에 들어가고 싶어요.”
“응?”
“이런 기록 읽는 거 좋아하거든요.”
여자 궁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여길 들어오겠다고? 여긴 매일 야근이야. 정보량이 만만치 않거든. 게다가 너만 보면 기억 장치들이 말썽인 게 좀 그렇긴 한데 말씀은 드려볼게.”
크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궁인이 시계를 봤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쉬다 와. 오후엔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세라.”
크리스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세라를 불렀다. 세라는 빵과 스프를 가지고 크리스의 건너편에 앉았다.
“뭐 알아낸 거 있어?”
“음⋯⋯. 궁의 구조. 나 치안부 실습 갔거든. 치안부는 두 번에 걸쳐 실습하나봐.”
“나는 기록부. 근데 뭔가 이상해. 기록 관련 장치들이 날 인식하지 않아.”
“그렇구나.”
크리스는 멍하게 세라를 쳐다봤다. 세라가 음, 소리를 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너 숨기는 건 그만둬.”
“응?”
세라가 딸꾹질을 했다. 크리스가 빵을 뜯으며 말했다.
“있잖아. 다 티 나.”
“⋯⋯.”
세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은 어제 에밀리아님의 방에 갔을 때 들은 얘기 긴한데.”
“응.”
“우리는 몰라야 한대. 황궁이란 그런 곳이라고. 생존해야 한다고.”
수저를 들던 크리스가 멈칫했다. 팔짱을 낀 세라는 천장을 멍하게 쳐다봤다.
“그 이후가 기억이 잘 안 나. 뭐라 더 말씀하신 것 같았는데.”
“⋯⋯그래도 찾아야해.”
크리스가 스프를 입에 밀어 넣었다.
“난 더 이상 뺏기기 싫어.”
“음⋯⋯.”
“찾은 정보나 얘기해줘. 리에한테 전달도 해야 하니까.”
“그래.”
세라가 말했다.
“치안부는 통금 시간 이후에도 돌아다닐 수 있어. 그리고 관리부에 가장 잘 들어가는 부서 중 하나라고 그랬어.”
“그렇다면 황제에게 접근하려면 치안부가 나으려나⋯⋯.”
“기록부도 괜찮지 않아? 거기에 모든 정보가 있을 거 아냐.”
“열람 권한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게 좀 크긴 해. 그리고 앞서 말했지만, 기록 장치들이 계속 날 거부해.”
“그건 좀 위험하겠다.”
크리스가 물었다.
“너는 괜찮아? 거울이 깨지거나 그렇진 않아?”
“일단 나는 안 그랬어.”
아, 그러고 보니. 세라가 말했다.
“지하 있잖아. 그러니까 본관에 딸린 지하실 말이야.”
“응.”
“거긴 치안부 고참들도 못 들어간대. 황제 폐하의 명령이래. 어기면 목이 날아간다고 해.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진짜 위험하긴 한데.”
“지하라.”
“⋯⋯그리고 치안부에서 들었는데, 황제 폐하 진짜 무섭대. 눈을 보일 때마다 수석들도 긴장한다고 하더라. 눈빛이 진짜 칼 같대.”
두 사람 위로 그림자가 졌다. 한 여자아이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안녕, 세라.”
“엘리사!”
엘리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이리로 왔어.”
“완전 환영이지. 어서와.”
엘리사가 말했다.
“황제 폐하 얘기하고 있었어?”
“응⋯⋯.”
“폐하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야. 폭정만 계속되던 황실을 뒤집어엎으셨으니까.”
크리스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폭정⋯⋯?”
“응. 난 그래서 황제 폐하가 아주 좋아.”
크리스는 리에의 말을 떠올렸다. 황제는 잔인하다. 무섭다. 그리고 엘리사가 말한 이야기까지. 어느 방향에서 봐도 모양이 다르다.
황제는 결국 무슨 모습을 하고 있을까?
“폭정이라니 그게 무슨 얘기야?”
“하긴 세라는 시골 출신이라 잘 모르겠다.”
엘리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전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신 후, 황후께서 잠깐 정권을 맡으셨는데⋯⋯.”
“그게 많이 갈렸지.”
센틀리가 나타났다. 세라가 툴툴거렸다.
“넌 언제 나타난 거야? 역사하면 나타나네.”
“난 황실을 굉장히 좋아하니까. 뭐든 다 알고있어. 그렇지만 말 못 해. 황실이란 이런 곳이니까.”
“말해봤자 흑발들이 뭘 알겠어? 시간 낭비라고.”
“비브, 넌 닥쳐.”
크리스는 조용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흑발이 잘못이라도 했어?”
“뭐?”
“그냥 궁금해서⋯⋯.”
센틀리가 고민하더니 비브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애초에 너희가 혈통 검사에 통과한 것도 의문이야. 머리색은 출신지를 나타낼 때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건데.”
“이온이란 얘도 흑발이던데.”
“아, 그 녀석은⋯⋯.”
구석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보니 한 여자가 웅크린채 궁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자는 계속 고개를 수그리고 비는 듯 했다.
“죄송합니다!”
“아, 진짜. 이래서 몰락귀족들은.”
센틀리가 혀를 쯧쯧 찼다.
“로지서로군.”
“로지서?”
“과거에 가장 크게 몰락한 귀족 중 하나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엔 로지서의 세상이었어. 지금은 궁에서 궁인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지만.”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크리스와 세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비정상적인 아름다움, 각진 외모, 긴 머리카락까지.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외모를 지닌 소녀.
크리스와 세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목소리를 제외하고 리에를 쏙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