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널 비추지 않아. 기억할 뿐.
von 제이여라
07.
날이 밝자마자 수습 궁인 열다섯 명 모두가 지하 교실에 모였다. 오늘부터 황실에 대한 이론을 배우는 날이기 때문이다. 카산드라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좋아, 다들 모였지? 하나, 둘, 셋, 넷⋯⋯. 열다섯 명 맞네! 자, 다들 이리와. 나눠줄 게 있어.”
상급 궁인 두 명이 안에서 상자를 가져왔다. 수습 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상자 안에는 파란 거울 열다섯 개가 들어있었다.
“지금부터 너희가 쓸 거울이야. 지금까지 사용해왔던 거울은 과감히 버려. 이제 궁인이 되었으니 궁인 신분에 맞는 거울을 써야지.”
크리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거울⋯⋯.”
레베카의 마지막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황궁에 들어오기 전 크리스는 혹시 몰라 레베카의 거울 역시 챙겨왔다. 혹시나 싶어서.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거울과 궁인 전용 거울은 사용 방법이 좀 다르니까 잘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보통 거울은 얼굴을 비출 때 사용되지만, 눈동자를 비출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함을 가지고 있지.”
카산드라가 이온을 쳐다봤다.
“이온. 거울의 원래 용도를 말해볼래?”
“네, 알겠어요.”
이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은 개인의 기억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여요. 거울에 담는 실용 마법 공식이 눈동자와 공명해서 시각에 의존해 기억을 기록하죠.”
“정답이야! 일기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기록은 절대로 지울 수 없어. 그리고 거울 주인과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눈동자를 비춘다면 자신이 포함된 기억을 볼 수도 있지. 여기서 궁인 거울과 일반 거울의 차이가 생겨.”
카산드라가 앞에 앉아있던 수습 궁인 한 명에게서 거울을 받았다. 수습 궁인이 카산드라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카산드라의 눈동자를 비춘 거울의 표면이 흔들렸다.
“궁인 거울은 일반 거울과 달리 하루를 자동으로 기록해. 그 하루를 제출과 허가라는 단계를 거치면 자신보다 아랫 단계 궁인의 기억을 볼 수 있어. 물론 앞서 말했듯이 소유자의 허락이나 제출이란 절차를 거쳐야하고 사적인 기억은 볼 수 없을 거야. 기숙사에서의 기억이라던지. 한 번 해봐.”
캐롤리안이 거울을 집어들었다. 눈동자가 비추자 흐릿하게 캐롤리안 시각에 의존한 기억이 거울 표면에 서렸다. 수습 궁인들이 웅성거렸다.
“와, 신기하다.”
“직접 해보는 건 처음이야!”
“그렇다면 내 역사가 다 기록된다는 건가? 와, 너무 끔찍한데요.”
얼굴을 붉히는 케네디를 바라보던 크리스는 천천히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어색하게 눈동자를 비추자 뭔가 흐릿하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금이 가더니 거울이 깨졌다.
“앗, 건드리지 마!”
카산드라가 유리조각과 크리스를 멀어지게 했다. 카산드라가 중얼거렸다.
“궁인 거울은 깨지지 않는 공식이 들어가는데, 깨질 수가 있나? 일단 새 거로 다시 줄게. 내일이나 모레쯤. 그때까진 불편해도 좀 참아.”
“네.”
크리스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기억은 절대로 지울 수 없다는 말이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은 어디로 갔는가. 순간 어제 느꼈던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당연한 것을 빼긴 느낌. 기계의 나사를 누가 훔쳐간 느낌.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을 뺏어간 그는 대체 누구인가. 순간 어떤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잊어.”
그렇다면 그 꿈은 그냥 꿈이 아니라는 건가?
거울에 대한 수업이 끝난 쉬는 시간, 크리스는 세라에게 말했다.
“기억은 지울 수 없다 했잖아.”
“그랬지.”
“근데 내 기억은 왜 지워진 걸까?”
세라가 두 눈을 깜빡였다. 크리스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존재는 단순한 공백이 아닌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뺏어간 것 같아. 기억을.”
세라는 천천히 크리스를 훑었다. 크리스의 눈이 시퍼렇게 변했다.
“너도 그걸 느꼈어?”
“응?”
크리스가 천천히 세라를 쳐다봤다. 세라가 말했다.
“나도 입양되기 전, 그러니까 고아였을 시절의 기억이 전혀 없어.”
“뭐?”
크리스가 단말마처럼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크리스를 향했다. 크리스가 대충 얼버무리고 세라에게 속삭였다.
“그, 그러니까 그런 중요한 사실을 왜 말 안 했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어. 어렸을 때라 기억이 안 떠오르나 싶었지.”
크리스와 세라의 얼굴이 굳어갔다.
“자자, 우리 수습 궁인 여러분! 아직 배울 게 산더미처럼 남아있어요! 다시 자리에 앉도록 하세요!”
카산드라가 칠판을 두드렸다. 다시 옹기종기 모인 수습 궁인들의 수를 확인한 그는 입구에서 들어오는 에밀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준비됐습니다.”
“알겠어요.”
에밀리아는 안경을 고쳐 썼다.
“이제부터 교육할 내용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제가 직접 교육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황제 폐하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지요.”
수습 궁인들이 술렁였다. 에밀리아가 말을 이었다.
“인간이 서 있는 세계는 뭐로 이루어져 있죠?”
센틀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시간과 운명입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에밀리아가 칠판에 글씨를 썼다.
“시간은 길, 운명은 갈래. 그리고 그들은 인간이 없으면 의미가 담기지 않는 그릇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간과 운명은 인간 없이, 인간은 시간과 운명 없이 살아가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세계는 시간과 운명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나 일부 혈통은 그들을 몸에 담을 수 있고 그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실 겁니다.”
에밀리아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세라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이자 센틀리가 작게 덧붙였다.
“우리가 모실 황제 폐하 이야기잖아.”
“황제는 뭐가 달라?”
“세라양, 좋은 질문이군요.”
에밀리아가 세라를 째려보다 다시 칠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앞서 말했듯 일부 혈통은 시간과 운명을 개념으로만 남기지 않고 실체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혈통 중에서도 시간과 운명에게 선택된 사람만이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황제가 되는 겁니다. 다만 이번 황제 폐하께서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힘을 가진 자가 따로 존재합니다.”
크리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때, 세라가 손을 들었다.
“그래요, 세라양.”
“왜 선택권이 운명과 시간에게 있나요?”
웅성이던 모든 입들이 멈췄다. 에밀리아가 말했다.
“시간과 운명으로 세계가 이루어져 있기에⋯⋯.”
“근데 앞서 말씀하신 걸 토대로 보면 인간이 없으면 의미 없는 그릇이라 하셨잖아요. 말 그대로 인간이 없으면 그냥 단어 아닌가요?”
에밀리아가 천천히 모자를 들춰올렸다. 크리스가 봐도 그 정적은 정말 이상했다. 에밀리아가 대답하지 못한 공백이었기 때문에. 분위기 눈치를 보던 이온이 세라에게 속삭였다.
“특별한 아이는 특별한 질문도 하는구나.”
“세라양.”
에밀리아가 팔짱을 꼈다.
“오늘 저녁에 제 방에서 뵙도록 하죠. ”
에밀리아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계속 이어지는 말 속에 뭔가 엉켜 있었다. 크리스는 이 순간을 천천히 기억에 새겼다.
*
“⋯⋯나 진짜 가?”
“제발 입 좀 다물고 다녀와.”
“크리스, 같이 가줘.”
“세라!”
크리스는 안 가려고 하는 세라를 겨우겨우 복도에 밀어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득 레베카의 거울이 떠올랐다. 크리스는 방에서 천천히 레베카의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거울을 가로로 세워도 세로로 세워도 거울 뒤 편을 바라봐도 거울은 크리스의 눈동자만 비출 뿐 작동하지 않았다.
“⋯⋯왜 안 되는 거지.”
크리스는 너머에서 거울로 장난치는 여자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아주 쉽게 거울을 사용하며 서로의 기억을 엿보고 웃고 있었다.
“뭐해?”
이온이 다가왔다. 크리스는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거울을 넣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네 동생 엄청나더라. 그런 걸 묻고 말이야. 너도 신기해. 거울이 그렇게 깨지는 건 처음 봤어.”
“아⋯⋯.”
크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걘 원래 그래. 그리고 동생 아니야. 동갑이긴 한데. 생일은 걔가 더 빨라.”
“그렇구나. 손은 괜찮아?”
“음⋯⋯.”
크리스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베이긴 했으나 피는 나오지 않았다.
“괜찮은 것 같아.”
“이런 걸 보통 거울이 거부했다고 하지.”
센틀리가 끼어들었다. 크리스가 물었다.
“거울이 거부하다니?”
“거울도 주인을 알아보는 법. 그 거울은 네가 싫었나보지. 하여튼 고생길이 훤하다, 너는.”
이온 옆으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비브가 말했다.
“흑발이라 거부한 거겠지. 반역자의 색은 정말 끔찍하다니까.”
“비브의 말은 무시해. 원래 저런 애들이 있잖아. 사회성 있는 척 하는데 없는 애들.”
“캐롤리안! 넌 좀 조용히 해!”
크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격려해줘서 고마워.”
“너도 참 고민이 많겠다.”
크리스는 가만히 발끝을 내리다 보다가 이온을 쳐다봤다.
“혹시 남의 거울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해? 일반 거울 말이야.”
“일반 거울? 그냥 눈동자를 비추면 거울과 공식이 알아서 할 텐데.”
“⋯⋯그래?”
크리스는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뭔가 잡음이 들렸다.
“⋯⋯또네?”
“뭐가?”
이온이 투명한 표정으로 크리스를 쳐다봤다. 크리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끝에 섰다. 다시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잊어.”
“⋯⋯.”
또 다시 잊으라는 목소리. 꿈에서 본 형상이 아른거렸다. 크리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싫어.”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잊어.”
“왜?”
“살아남으려면 말 들어.”
“싫어.”
크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삶은 내 거야.”
흐릿하던 감정이 점점 형태를 갖추었다. 하얀 종이만 가득했던 세상에 드디어 검은 점이 하나 생겼다. 크리스는 천천히 레베카의 거울과 로지서의 거울, 레베카의 일기장을 꺼냈다.
“내가 끝까지 찾아줄게.”
크리스의 눈에 푸른 빛이 감돌았다. 확신과 의지가 담긴, 그런 빛 말이다. 레베카의 거울 표면 위, 빛이 사그라들었다.
크리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땐 세라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크리스가 물었다.
“혼은 좀 났어?”
“⋯⋯.”
세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가 다시 물었다.
“세라?”
“⋯⋯기억이 잘 안 나.”
“뭐? 방금 다녀왔잖아.”
“기억이 안 난다면 좀 들어! 지금은 말 못해.”
세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방으로 돌아갔다. 크리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