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널 비추지 않아. 기억할 뿐.
von 제이여라
06.
“자, 환영한다! 내 이름은 카산드라 미카엘, 우리 C조만의 상급 궁인이야. 아 물론, 황제 폐하께 목숨을 바치는 게 최종 목표지.”
카산드라는 활짝 웃으며 어색하게 서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웃으라는 말 한마디가 매우 무겁게 들렸다.
“자, 그럼 다 왔는지 확인해볼게. 먼저 캐롤리안.”
“네!”
“다음은 이온.”
이온이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캐네디와 시리아스⋯⋯. 카산드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크리스를 바라봤다.
“크리스.”
카산드라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크리스가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좋아. 다 왔구나. 앞으로 너흰 같이 생활하게 될 룸메이트이자 경쟁 상대야. 아까 말했지? 제안은 안 올 수도 있다고. 안 오면 그대로 궁에서 쫓겨나는 거야. 알겠지?”
카산드라가 종이를 넘겼다.
“그렇다면 이제 규칙을 설명해줄 건데, 먼저 예법이야. 눈동자에 대한 건 다들 알지? 아, 혹시나 얘기하는 건데 황제 폐하를 만난다면 눈동자부터 보여주는 게 좋을 거야. 우리는 모두 황제 폐하의 소유물이잖아? 소유물은 주인이 잘 알아야겠지?”
웅얼거리던 카산드라가 다시 설명을 시작하려는 그때, 밖에서 쾅, 소리가 났다. 곧이어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음? 무슨 일이지?”
카산드라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짓궂은 한 궁인이 외쳤다.
“수습 궁인들 끼리 싸움났대!”
“오, 정말, 이 아니라 큰일이잖아! 폐하께서 아시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크리스의 머릿속에 세라가 떠올랐다. 설마, 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카산드라를 따라 현장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오랫동안 이온이 지켜보고 있었다.
복도는 난장판이었다. 금발 머리의 남자가 한 여자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었다. 실루엣을 보니 세라가 틀림없었다. 세라도 지지 않고 손을 마구 휘둘렀다. 세라의 뒤에선 한 여자아이가 웅크린 채 부어오른 볼을 만지며 울고 있었다.
“당장 사과해!”
세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아이가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더 꽉 쥐며 말했다.
“너나 그만 하는 게 좋을 거야! 반역자의 색을 달고 궁에 들어온 게 누군데!”
“세라!”
크리스가 둘 사이에 꼈다. 남자아이가 삐뚜름한 눈으로 크리스를 노려봤다.
“괜찮아?”
“크리스, 넌 비켜!”
크리스를 밀친 세라가 남자아이의 로브를 붙잡았다. 크리스가 어떻게든 세라를 말리려 했지만, 그녀의 몸부림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뭐하는 거야! 카산드라가 다가오려던 그때였다.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죠?”
에밀리아가 다가왔다. 복도가 침묵에 휩싸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세라양.”
세라가 억울하다는 듯 남자아이를 가리켰다.
“흑발이란 이유로 비브가 엘리사를 때렸어요.”
엘리사라 불린 여자아이가 코를 훌쩍였다. 비브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럴 리가요. 그냥 알려주려 했을 뿐입니다. 반역으로 몰락한 귀족 나부랭이가 상급 궁인님 앞에 기고만장하게 서 있길래. 그것도⋯⋯.”
에밀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폭력 행위가 있었다는 건 맞다는 소리군요.”
에밀리아가 카산드라와 상급 궁인들을 쳐다봤다. 그들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수습 궁인에게 꿇는 자세를 알려주지 않고 뭐했습니까. 그러고도 당신들이 상급 궁인입니까? 아무리 몰락귀족이어도 들어오면 다 같은 궁인입니다. 머리카락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비브군은 따로 제 방에 와주셔야겠습니다. 세라양은 오늘 저녁 식사 금지입니다.”
에밀리아가 세라를 천천히 바라보다 그대로 지나쳐갔다. 한 상급 궁인이 세라를 바라보며 급하게 외쳤다. 크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낮춰 세라에게 속삭였다.
“무슨 짓이야. 이렇게 하면 눈에 띌 텐데.”
“그렇다고 방관하라는 얘기야? 비겁하게?”
“진정 좀 해! 너희 다 죽고 싶어?”
센틀리가 세라를 밀쳤다. 세라는 이를 악물었지만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너희, 정말 대단하네.”
이온이 다가왔다. 세라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이온을 쳐다봤다.
“에밀리아님이 저렇게 나오는 건 처음 봐. 세라라고 했나? 에밀리아님 눈에 띄어 관리부로 가는 게 꿈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몰랐던 건 아니지? 에밀리아님은 싸움이 나면 양쪽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 데 말이야. 너만 저녁 식사 금지로 끝났네.”
크리스와 세라가 천천히 서로 쳐다봤다. 이온이 따뜻한 미소를 입꼬리에 걸었다.
“너흰 좀 특별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드네.”
“뭐가 특별해. 그냥 몰락 귀족이랑 닮았으니 봐주는 거 아니겠어? 에밀리아님께선 흑발 분들을 많이 모셨잖아.”
센틀리가 팔짱을 꼈다. 크리스는 천천히 창문에 비친 자신의 머리색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응?”
“꿈에서 뭔갈 잊으라고 했던 그도 흑발이었지.”
크리스가 천천히 손을 내려다봤다. 카산드라가 외쳤다.
“자, 다들 안으로 들어가. 아직 알려줄 게 많아.”
다시 C조가 방 가운데에 모였다. 카산드라는 황실의 예법과 간단한 황궁 배치도를 알려주고 궁인 숙소로 돌아갔다. 카산드라가 떠난 후, C조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어. 설마 황궁에서 싸우다니 말이야.”
“그니까. 무섭지도 않나 봐.”
“크리스, 너는 그 여자애랑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흑발에 머리카락 긴 여자아이.”
“아, 남매야.”
아이들이 술렁였다.
“진짜? 둘이 닮긴 했다.”
“피는 다르지만⋯⋯.”
“그렇구나. 어쩐지 성격이 안 닮아 보였어.”
이온이 음, 소리를 내다가 크리스에게 속삭였다.
“저렇게 당당한 흑발은 처음 봤어. 나도 심장이 철렁하더라고.”
“흑발이 그렇게 안 좋아? 너도 흑발이잖아.”
“크리스는 완전 시골에서 왔다고 했었나? 그럼 거울 쓰는 법도 모르겠다.”
이온이 천천히 머리카락을 꼬았다.
“귀족 세계에서는 머리카락색도 중요해. 우리가 정할 수 없는 것들 있지. 피부색이나 이런 거. 그런 것들이 운명을 결정하지.”
“응.”
“이번에 황제 폐하가 바뀐 건 알지? 덕분에 흑발에 대한 시선도 많이 달라졌지.”
이온이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들은 얘기지만.”
캐롤리안이 말했다.
“그래도 말이지. 요즘은 머리 색으로 차별하는 건 좀 그렇다는 의견이 많아서. 너무 신경 안 써도 좋아. 실제로도 너희 혈통 검사에서 통과했잖아.”
“응, 고마워.”
크리스는 위에서 빛나고 있는 수정을 바라봤다.
*
세라는 식당 앞에서 쭈그리고 앉은 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식당에선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맞는 말만 했는데 밥 안 주는 건 너무 하잖아.”
“싸움은 양측의 과실이 맞지.”
세라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로브를 걷은 크리스가 보였다. 크리스의 손엔 빵이 하나 들려있었다.
“빵이다.”
“너 배고플 것 같아서.”
“이럴 땐 참 고맙다니까.”
세라가 빵을 받아 한입에 삼켰다. 그런 세라를 멍하게 바라보던 크리스는 천천히 입을 땠다.
“에밀리아라는 사람 말이야. 이것저것 의문이 들어.”
“⋯⋯너도 느꼈어? 좀 이상하지?”
“이상하다기보단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 너만 저녁 식사 금지로 끝났잖아.”
“알고 있겠지. 20년동안 수장이었다면서. 아는 게 엄청나게 많겠지.”
세라가 천천히 크리스를 쳐다봤다. 크리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네 말대로 황제에 다가가려면 저 사람이 필요할지도 몰라. 아까 이온이 말했잖아.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나보고 저 사람 마음에 들라고?”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세라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해. 네가 해. 네가 더 똑똑하잖아. 인간관계는 잘 모른다고. 특히 궁은 더. 날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도 짐작이 안 가는데.”
“일단 눈에 띄려고 나도 나름대로 정보를 찾아볼게.”
남매는 점차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그들을 멀리서 에밀리아가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쥔 거울을 바라보며 천천히 모자를 눌러썼다.
“살아 있었구나.”
그녀는 눈을 감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다시 감정을 지운 얼굴로 돌아온 그녀는 남매를 가만히 지켜봤다. 아주 멀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