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널 비추지 않아. 기억할 뿐.
von 제이여라
04
지하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계단에선 흔히 나는 삐걱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지하를 관리하던 하인 두 명이 크리스와 세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는 가장 가깝게 배치된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붉은색 표지를 지닌 책이었다. 윗층과 다른 점이라면 지나치게 얇고 제목이 적혀있지 않았다.
“이건 무슨 책이야?”
세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크리스는 천천히 책을 넘겨 목차를 찾아냈다. 목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책의 내용도 모두 백지였다. 책장에서 고른 다음 책도, 다음다음 책도 모두 백지였다.
“뭐야, 아무것도 안 적혀 있잖아.”
“마법 공식이라도 넣어볼까.”
크리스가 세라를 쳐다봤다.
“너 마법 쓸 줄 알아? 그런 건 귀족만 쓸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실용 마법이면 쓸 수 있어. 예를 들면…….”
그때, 책 위로 선들이 그어졌다. 선은 모여 단어를, 단어들은 문장을 만들었다. 크리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라를 쳐다봤다.
“공식을 넣었어?”
“아니, 이건 내가 한 건 아냐. 애초에 실용 마법은 간단한 것들만 이뤄주잖아. 이건 실용이 아니라 책에 걸려있는 마법인 것 같은데. ”
두 사람이 천천히 글씨를 읽어내렸다.
“로지서…….”
가장 커다랗게 적힌 글씨를 읽던 순간.
책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나더니 표지가 닫혔다.
“이거 왜 이래?”
세라와 크리스가 힘을 합쳐 표지를 넘기려도 해도 넘겨지지 않았다.
마치 무거운 추가 달린 것 같았다.
다른 책도 마찬가지였다.
표지가 넘어가지 않거나 종잇장이 전부 백지였다.
“이래선 조사를 할 수 없잖아.”
지하실엔 책장뿐이었고 그나마 볼 수 있는 책 제목도 엉망진창으로 쓰여 있었으므로 결국 두 사람은 지하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리에가 짜잔, 하고 나타났다.
“안녕! 성과는 있었어?”
“지금 장난해?”
“책이 그냥 닫혀버리던데.”
리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책 표지가 안 넘어가.”
리에가 머리카락 덩이를 보내 책 표지를 잡았다.
그러나 리에의 무력에도 책은 열리지 않았다.
“신기하네.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 보는데.”
“결국 성과는 로지서라는 단어밖에 없었네.”
“로지서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숨기는 거지?”
“귀족이야.”
세라가 말을 멈췄다. 리에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귀족이었지.”
순간 세 사람 사이에서 정적이 돌았다. 무언가 어색한 정적이. 정적을 눈치챈 리에가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우리 공부를 시작해볼까?”
“공부?”
“시험에 통과해야지. 적을 알면 백전백승, 일단 적이 뭔지 알아야겠지?”
리에가 구석을 가리켰다. 아까 리에가 건네줬던 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크리스가 말했다.
“우리 보고 의학을 공부하라고?”
“겉으로 보기엔 의학책이지만 그건 의학책이 아니거든. 이리 줘.”
리에가 머리카락으로 책을 받았다. 손을 허공에 흔들자 종이에 적힌 글씨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세라가 물었다.
“마법이 안 걸려 있다는 건 저건 기록용이 아닌가보네?”
“정답!”
리에가 책을 건넸다. 크리스가 다시 책을 받아 읽었다. 앞서 나와 있던 의학 공식은 사라지고 처음 보는 내용의 글들이 적혀있었다.
“1부터 배우는 황실 안내서라고 하면 좀 이해가 되려나?”
“그러고 보니 우리 황궁에 들어간다고 했었지.”
크리스가 책을 살펴보다 사색이 되어 리에를 쳐다봤다.
“설마 이것들 전부 다 외워야 해?”
“응.”
“시험에 나온다는 소리야?”
“황실에서 일하게 될 테니 당연히 시험에 나오지. 네가 황제라면 무지한 사람과 아는 사람, 뭘 뽑겠어? 당연히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뽑지.”
세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시골에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건 예쁜 변명일 뿐이야. 일단 하고 봐야지. 이번에 바뀐 황제는 그런 것에 더 민감하니까 잠은 다 잤다고 생각해.”
“황제가 바뀌었어?”
리에가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웃으며 이어 말했다.
“응. 최근에.”
리에는 크리스와 세라에게 책 한 권씩 쥐어주었다. 그러곤 다시 모자를 푹 눌러썼다.
“난 가봐야 해.”
“알려준다며. 어디가.”
“동생이 있거든. 곧 동생이 돌아올 시간이라 얼굴 보러 가야 해. 그때까지 천천히 읽어봐. 아니면 집을 더 찾아봐도 돼.”
“야, 잠시만!”
세라가 그녀를 어떻게든 막으려 했지만 리에는 머리카락을 사용해 멀리 뜀박질 한 후였다. 세라가 혀를 쯧 찼다.
“진짜 뭐하는 애인지 모르겠네.”
“읽기나 하자. 이게 최선이야.”
크리스와 세라는 다시 옹기종기 모여 책을 펼쳤다. 리에가 말한 것처럼 무언가 크게 바뀌었는지 책은 생각보다 두꺼웠다.
“으악, 황실 계급도에 예법에 금기? 이걸 다 외워야 해?”
세라가 머리를 붙잡았다. 크리스는 다음 장으로 종이를 넘겼다. 황실의 역사에 대해 적혀 있었는데, 최근 세대에 들어선 내용이 복잡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냈다.
“마치 기록서 같네.”
내용은 단조롭게 상황을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관찰자 같았다. 계속 누군가가 기록하고 있는 모양인지 내용이 가끔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문장들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확실한 것부터 보기로 했다. 가장 최근에 서술된 새로운 황제에 대한 내용이었다.
“전 황비의 폭력적인 대리청정을 멈추고 새로운 황제가 탄생했다. 그는 후궁 메리 제이의 유일한 아들로, 역사상 가장 총명한 황제로 평가된다.”
황제의 이름은 키리오 아르티나.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단어에 멈췄다.
“키리오네. 우리 황제를 조사하나 봐.”
“키리오? 아니, 잠깐만. 아르티나?”
세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로운 황제를 우리가 조사해야 한다고? 아니, 그것보다 후궁 소생이잖아?”
“후궁 소생인게 왜?”
“후궁 소생은 절대로 황제가 될 수 없을 텐데.”
“그런 건 차별 아냐?”
“아냐. 유전적으로 황제의 힘을 받지 못할 거야. 내가 알기엔 그래.”
세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우리보고 조사해라?”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게 새로운 황제의 비밀을 캐는 거네.”
“그게 실질적으로 가능해? 황제라고. 황제의 비밀이면 우리의 목숨이 달려있잖아. 잘못하다간 우리 목이 날아갈 수 있어. 게다가 글 적힌 거 보면 절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황제가 된 건 아닌 것 같다고.”
세라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크리스, 이건 거절하는 게 좋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차라리 길거리에서 노숙하지.”
“응. 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렇게는 안 될 거다.”
그림자가 다시 사람의 형체로 변했다. 세라가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우리에게 준 성의라면 다시 돌려줄테니⋯⋯.”
“그 문제가 아니다. 너흰 이미 구조에 들어갔다. 말은 결국 사라지지만 남는 건 기록이다. 선택은 되돌릴 수 없어. 이미 기록됐을 거다.”
세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더 조사를 진행하는 게 맞았는데.”
“쉽게 알고 싶다면 협조해라.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크리스는 이미 납득한 것 같군.”
세라가 크리스를 돌아봤다. 크리스는 그림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색이 된 얼굴로 세라가 물었다.
“크리스, 진짜 하려고?”
“⋯⋯.”
그림자는 천천히 다시 커튼으로 돌아갔다. 세라가 뭐라 말하려 하던 그때, 크리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마당으로 이끌었다. 마당에 딸린 창고 구석에 들어간 크리스가 손바닥을 펴고 속삭였다.
“저 사람들을 이용하자.”
“이용이라니?”
“저 사람들은 뭔가 알고 있어. 우리를 그냥 고른 게 아니야. 우리도 우리만의 정보가 있어야지.”
“그래도 그렇지 이런 위험한 일을⋯⋯.”
“돈이 모일 때까지 하는 척만 하자. 그러면 되겠지. 확신은 없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게 제일 손해가 적어. 우리도 안정적으로 있을 터전이 필요해.”
결국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마치 외줄에 올라선 것 같았다. 다시 거실로 들어오면서 크리스가 중얼거렸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인데. 갈피가 안 잡혀. 가능이나 할까.”
“당연히 가능하지. 우리 장로님의 눈을 과소평가하는 거 아냐?”
리에가 박수를 짝, 치며 다가왔다.
“미안, 동생이 좀 아파서. 우리 장로님은 절대로 헛된 판단 같은 거 안해. 너희에게 뭔가 있다고 생각하셨을 테고. 그러니 해. 한다고 했으니 일을 진행시켜야지?”
창고처럼 보이는 방에서 리에가 칠판을 끌고 왔다. 크리스와 세라는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봤다.
“책을 주긴 했지만 부족할 것 같아서 내가 설명해줄게.”
분필로 칠판을 치며 리에가 말했다.
“잘 들어. 궁인 시험에는 단계가 있어.”
리에는 천천히 칠판에 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글거리는 선이 모여 모양을 만들어냈다.
“일단 시험 전엔 수습 궁인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군대로 치면 훈련병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거기서 약 2개월 간 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룬 후 그 능력에 따라 부서를 배정받거나 쫓겨나게 될 테지.”
“수습⋯⋯?”
“세라 너, 설마 이것도 모른다고 하는 건 아니지? 궁의 예법이나 기초적인 일을 배우는 단계야. 당연히 급여는 나오니까 쟁여둬.”
리에가 다시 칠판에 글씨를 썼다. 선이 뻗어 나갔다.
“부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세 개만 알려줄게.”
첫번째 갈래 밑엔 기록부라는 글씨가 적혔다.
“첫째는 기록부라는 곳이야. 정보부라고 부르기도 해. 진실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곳이지. 아까 내용이 변하는 책 봤지? 그것도 기록부에서 관리하는 거야. 대부분의 기록물은 이 기록부를 거쳐서 나와.”
두번째 갈래. 리에가 분필을 바쁘게 움직였다.
“두번째는 시중부. 황실 사람들을 모시지.”
셋째. 크리스와 세라의 시선이 분필을 따라 움직였다.
“이곳은 음,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관리하는 곳이야. 궁 내의 치안을 관리하는 곳이니까 치안부라고 하는 게 좋겠다.”
그 후로 여러 부서들이 적혔고 분필이 여러개의 갈래를 하나로 묶었다. 그 위로 관리부라는 글씨가 적혔다.
“그리고 이 부서들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관리부까지. 관리부의 수장은 황제야. 황제가 직접 제안을 하지.”
크리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제안이 와야 갈 수 있는 거야?”
“응.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해.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수습 궁인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룹별로 관리자가 붙어. 그 관리자가 너희를 판단해서 윗선에게 보고하는 그런 식. 뭐 너희가 직접 느끼면 알겠지.”
“복잡하네.”
“말했잖아. 이번 황제는 굉장히 까다롭다고. 관리부의 수장은 결국 황제니까 잘 보이도록 해.”
가만히 듣고 있던 세라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 궁금한 거.”
“오, 좋은 자세야. 뭔데?”
“황제는 어떤 사람이야?”
“잔인하지. 사람을 그렇게 죽였으니.”
“그런 사람을 우리보고 조사하라고?”
앞길이 캄캄하잖아. 세라가 웅얼거리며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나 말거나 리에는 설명을 이었다.
”수도에서 눈이 중요한 건 알고 있지?”
“응. 이름보다 눈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잖아. 사람은 세계이며 눈동자는 그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기 때문에.”
“맞아. 궁에선 눈을 보여주지 마. 남의 세계를 함부로 보는 행위는 예의에 어긋나. 게다가 황궁에서 그러면 매타작 맞는 거지. 알겠지?”
두 사람 뒤로 대문이 닫혔다. 닫힌 대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