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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뒤로 끌려간 탑스타

von 영우 · 2026-10-27

태진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여화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은퇴한 사람한테 쉬엄쉬엄 하라고 줄 액수가 아니었다.

"누굴 쏘라는 건데."

"쏘지 말라는 거다."

태진이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공항 입국장 CCTV를 확대한 사진이었다. 모자를 눌러쓴 마른 남자. 흐릿했지만 여화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목덜미까지 내려온 문신 끝자락이 낯익었다.

"사흘 전에 들어왔다. 류쑤징 밑에서 궂은일 하던 놈이야."

류쑤징.

여화가 사진에서 눈을 뗐다. 그 이름을 마지막으로 들은 건 블라디보스토크의 낡은 성에서였다. 류쑤징이 제일 귀한 보물처럼 모셔 둔 방, 포근하고 아늑한 침대 위에서 약에 취해 세상모르고 곤히 자고 있던 꼬맹이. 그 얼굴이 아직도 가끔 꿈에 나왔다.

"가문에서 쫓겨났다며."

"쫓겨났으니 더 독이 올랐지. 돈은 아직 남았고."

"목표는."

태진은 대답 대신 옥상 철문 쪽으로 턱짓을 했다. 그 아래층에서 아직 고기를 굽고 있을 남자.

여화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럼 너네가 잡으면 되잖아."

"상대가 상여그룹이다. 증거도 없이 우리가 먼저 움직이면 외교 문제야. 공식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거지."

"그래서 외주를 주시겠다."

"네 광고 촬영장. 강연무가 거기 붙어 있는 동안만 봐 주면 돼. 이 바닥에서 너보다 카메라 잘 읽는 사람은 없으니까."

여화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상추 잎이 바람에 사락사락 흔들렸다.

"조건 있어."

"말해."

"그 꼬맹이는 몰라야 돼. 끝까지."

"……그건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

"그리고 현금으로. 선불 반."

태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15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그래도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저 녀석이 돈 얘기를 한다는 건, 일을 받겠다는 뜻이었다.

여화가 옥상에서 내려왔을 때, 연무는 현관 중문 앞에 서 있었다. 계속 거기 서 있었던 게 분명한 자세였다.

"……사부님은 가셨어?"

"응."

"옥상에서 무슨 얘기 했어?"

"반찬 얘기."

연무가 입을 다물었다. 반찬 얘기를 하러 철문까지 닫고 올라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더는 묻지 못했다. 누나가 저렇게 대답할 때는, 몇 번을 물어도 반찬 얘기였다.

여화는 식탁으로 돌아가 식은 고기를 집어 먹었다. 연무의 옆얼굴에 슬쩍 눈길이 갔다. 고기 굽느라 벌게진 귀, 엄마 앞에서 바르게 편 어깨. 그날 블라디보스토크, 남의 침대에서 세상모르고 자던 얼굴과는 딴사람이었다.

다시는 그 여자 손에 안 넘긴다. 여화는 고기를 꼭꼭 씹어 삼켰다.

* * *

다음 날 아침, 성수동 공사 현장.

인테리어는 범이 담당이었다. 그 결과, 사무실 천장에는 미러볼이 매달렸고 벽에는 회사 이름 '샤아트'를 새긴 네온사인이 걸릴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책상은 바 테이블처럼 길게 이어 붙였고, 의자만큼은 애들 허리 나가면 안 된다며 제일 비싼 사무용 의자를 들였는데, 그마저 검은 가죽에 금색 징이 박혀 있었다. 회사인지 클럽인지 모를 공간이었다.

"일할 맛 나잖아. 너네 친구들 밤 자주 샐 텐데, 이 정도는 돼야 안 졸지."

범이의 주장이었다. 여화는 말리지 않았다. 범이 돈이었으니까.

드릴 소리가 울리는 사무실 한쪽, 아직 비닐도 안 뜯은 바 테이블 위에 태진이 보낸 봉투가 놓여 있었다. 약속한 선불 반이었다. 여화는 엄지에 침을 묻혀 가며 한 장, 두 장 세기 시작했다. 커피를 사 들고 온 범이가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형이 설마 덜 넣었겠냐."

"나라 돈이니까 세는 거야."

페인트 통을 들고 지나가던 동기 하나가 돈다발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웨딩 촬영 보조를 그만두고 이 사무실로 출근한 녀석이었다.

"와, 최 대표. 너 진짜 유학 가서 돈 엄청 벌었구나?"

"내 목숨값이야. 그러니까 열심히 해."

녀석은 농담인 줄 알고 킥킥대며 지나갔다. 범이만 웃지 않았다.

마지막 장까지 다 센 여화가 그제야 얼굴을 조금 풀었다. 그러고는 봉투를 범이 앞으로 툭 밀었다.

"범아, 이거 입금시켜."

"형도 참. 요즘 누가 현금을 들고 다닌다고."

"그러니까 너 주는 거잖아. 그 계좌에 넣어."

"그 계좌 비밀번호는 기억나냐?"

"몰라. 네가 알잖아."

범이가 한숨을 쉬며 봉투를 챙겼다. 15년 목숨값이 쌓인 유령 계좌. 주인은 비밀번호도 잔고도 몰랐다. 아는 건 범이뿐이었고, 범이는 12년째 그 돈을 악착같이 굴리는 중이었다.

"너 그 계좌에 지금 얼마 있는지 알면 기절한다."

"그걸로 기절했으면 난 벌써 열다섯 번은 죽었게?"

범이는 할 말을 잃었다. 총을 맞고도 기어이 살아 돌아온 제 친구한테 할 소리는 아니었다.

"홍매 좀 빌려줘. 촬영 날 하루."

"홍매를? 왜?"

"덩치 큰 사람 하나 필요해서."

범이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홍매가 들어오자, 범이가 여화를 가리키며 한마디만 했다. 촬영 날 하루, 얘 말이 내 말이다. 홍매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 형. 이거 입금도."

범이가 방금 챙긴 봉투를 홍매 손에 그대로 쥐여 주었다. 홍매는 이번에도 군말 없이 받아 들었다.

여화의 시선이 범이에게 가 꽂혔다.

"……너도 은행 가기 싫었구나."

* * *

그다음 날, 홍시 스튜디오.

"최여화. 너 살아 있었냐?"

스튜디오 문을 열자마자 날아온 첫마디였다. 덥수룩한 머리에 늘어난 티셔츠, 목에는 카메라 대신 줄자를 걸고 있었다. 업계 사람들이 반년을 줄 서서 기다린다는 홍시 감독은, 학교 때 과제 마감 전날의 얼굴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보다시피."

"15년 동안 연락 한 통 없더니, 와서 한다는 소리가 광고 찍어 달라고?"

"응."

"뻔뻔한 건 여전하네."

홍시가 투덜거리며 콘티 뭉치를 책상 위에 던졌다. 이미 그려 놓은 콘티였다. 여화가 부탁한 날 밤을 새운 게 분명했다.

여화는 콘티를 한 장씩 넘겼다. 그런데 보는 곳이 이상했다. 모델 동선이 아니라 그림 구석의 출입문, 창문, 조명 위치. 홍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지금 그거 콘티 보는 눈 아니다."

"장소 바꾸자, 선배."

"뭐?"

"한강 야외는 안 돼. 사람이 너무 많아. 실내로 하자. 출입구 하나짜리로."

"야, 그림이 안 나온다니까……."

"그리고 카메라 위치는 내가 정해. 내 쪽으로는 한 대도 안 돼."

홍시가 볼펜으로 머리를 긁었다. 학교 때도 그랬다. 졸업 작품 촬영 날, 여화는 끝까지 렌즈 앞에 서지 않았다. 카메라 뒤에서만 일했다. 그때도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너는 진짜…… 15년이 지나도 카메라 싫어하는 건 그대로냐."

"응. 그대로야."

홍시는 한숨을 푹 쉬더니 콘티 뒷면에 새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홍시였다.

"하나 더. 스태프 명단 줘. 조명, 분장, 케이터링까지. 외부 인력은 전부."

"그건 또 왜?"

"내 첫 광고잖아. 아무나 들이기 싫어."

홍시가 미심쩍은 눈으로 여화를 훑더니, 서랍에서 서류철을 꺼내 던졌다. 묻지 않는 게 낫겠다는 얼굴이었다.

* * *

"누나!"

스튜디오 문이 벌컥 열렸다. 모자를 눌러쓴 연무였다. 숨이 차 있었다.

"대표님한테 들었어. 오늘 홍시 감독님 만난다고."

"그래서?"

"그래서 왔지. 내가 모델인데."

연무는 여화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더니, 홍시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연무입니다."

"알아요. 우리 회사 문 두 번이나 두드렸던 소속사 간판이죠."

홍시가 시큰둥하게 받았다. 연무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근데 둘이 무슨 사이예요?"

이번엔 홍시가 물었다. 연무의 눈이 반짝였다.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여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촌 오빠네 회사 애."

"……."

연무는 그날 처음 알았다. 사람이 앉은 채로도 무릎이 꺾일 수 있다는 걸.

"노개런티라면서요. 돈도 안 받는데 왜 이렇게 열심이에요?"

홍시가 한 번 더 찔렀다. 연무가 무너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입가에는 여유가 걸려 있었다.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걸 바라고 하는 거라서요."

테이블 밑에서 여화의 발끝이 연무의 정강이를 툭 찼다. 바라지 말랬지. 연무는 아픈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웃었다.

회의 내내 연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홍시는 여화를 "야"라고 불렀다. 여화는 홍시의 커피를 제 것처럼 마셨다. 누나가 남의 컵에 입을 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범이 놈에, 사부님에, 이제는 선배.

"선배님은…… 누나랑 학교 같이 다니셨어요?"

"딱 1년이요. 제가 군대 다녀와서 4학년, 얘가 1학년."

홍시가 그때를 떠올리듯 피식 웃었다.

"신입생 환영회 날 처음 봤는데, 와. 세상에 저렇게 예쁜 애가 다 있나 했죠."

연무의 웃음이 또 한 번 굳었다. 홍시는 눈치채지 못하고 여화 쪽으로 턱짓을 했다.

"저 졸업하고 몇 년 동안 공사판 전전했거든요. 영상 쪽은 연줄 없으면 발 들이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그때 얘가 찾아와서, 자기 졸업 작품 좀 찍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걸로 아마추어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어요. 연출 좋다는 소리 그때 처음 들었고, 그 덕에 이 스튜디오까지 왔죠. 정작 얘는 끝까지 화면에 안 나왔지만."

"선배가 잘 찍은 거야."

"시나리오 쓴 게 누군데."

여화가 대꾸 없이 커피를 마셨다. 홍시는 그런 여화를 향해 투덜거리듯 입꼬리를 올렸다. 은인 앞에서 짓는 얼굴이었다.

연무는 사람 좋게 맞장구를 쳤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나 대학 시절 얼굴을 아는 남자. 나는 그 시절 누나를 비상계단에서 한 번 봤을 뿐인데.

연무가 화장실에 간 사이, 홍시가 턱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쟤, 너 좋아하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회의 내내 나만 노려보던데. 내가 너 커피 마실 때마다 눈에서 불이 나더라."

여화는 대답하지 않고 명단을 넘겼다. 목덜미가 괜히 따끔했다. 이 스튜디오에도 카메라는 없었는데.

* * *

회의가 끝난 건 해가 질 무렵이었다.

스튜디오 앞 골목은 한산했다. 연무가 모자를 고쳐 쓰며 여화 옆에 붙어 섰다.

"누나, 밥 먹고 가자. 내가 살게."

"돈 아깝게 뭘 사 먹어. 집에 가면 엄마 밥 있어."

"그럼 나도 어머님 밥."

"너 엊그제도 먹었잖아."

"어머님이 다음에 또 오라고 하셨어. 동생 데리고."

"동생은 안 데려오면서 너만 오잖아."

"……걔가 바쁘대."

연무가 시치미를 뗐다. 여화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골목을 나서기 전, 습관처럼 눈으로 거리를 훑었다. 편의점 앞 오토바이, 전봇대에 붙은 CCTV, 횡단보도 너머의 오피스텔. 입국했다는 그 남자가 지금 서울 어디쯤 있는지 쫓는 건 국정원 몫이었다. 여화가 이 꼬맹이 뒤를 하루 종일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태진은 걱정 말라고 했다. 놈 위치는 실시간으로 다 보고 있다고.

그 말이 허풍이라는 건 금방 드러났다.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골목 CCTV가 아니었다. 그건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이건 더 멀고, 더 가늘고, 더 끈질겼다. 길 건너편 오피스텔. 4층 창문 어딘가. 망원 렌즈였다.

렌즈는 여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여화 옆의 남자를 보고 있었다. 여화는 그 화면 귀퉁이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열기는 목에서 어깨로 번지고 있었다.

실시간은 무슨. 국정원 놈들, 일을 하긴 하는 거야? 벌써 붙었잖아.

여화는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연무의 손목을 낚아채 건물 기둥 뒤로 홱 끌어당겼다. 연무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여화의 몸이 그 앞을 가렸다. 렌즈가 닿지 않는 각도였다.

열기가 하나씩 꺼졌다.

여화는 기둥 너머로 오피스텔 창문을 노려보았다. 커튼 하나가 아주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그런데 연무는 그 창문을 보지 못했다. 연무가 보고 있는 건 바로 코앞의 얼굴이었다. 제 손목을 꽉 쥔 하얀 손. 가슴팍에 닿은 체온.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리고 독특한 향. 누나와 있을 때면 가끔 느껴지던 그 향. 숨을 들이쉴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누나가 날 잡은 건, 처음인 것 같다.

연무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 아시아 톱스타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주인이 처음 팔을 벌려 준 강아지처럼, 눈만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나, 안아 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