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열 판짜리 핑계
von 영우 · 2026-10-27
"왜? 뭐 있어?"
범이가 여화의 시선을 따라 골목 끝을 보았다. 검은 밴 한 대가 서 있었다.
"블랙박스."
여화는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목덜미를 손끝으로 한 번 더 쓸어내렸다. 공사장 정면을 정확히 겨눈 렌즈였다. 오래 서 있으면 귀찮아질 각도였다.
"연예인 밴 같은데? 이 동네 촬영 있나."
"아니."
여화는 휴대폰을 꺼내 범이 눈앞에 들이밀었다. 한 시간 전에 온 사촌 오빠, 박 대표의 문자였다.
[여화야 연무 간다 ㅋㅋ 모른 척해 줘]
범이가 피식 웃었다.
"강연무? 걔가 여길 왜."
"몰라. 커피라도 사 오려나? 쟤는 옛날부터 그랬어. 할 말 있으면 먹을 거부터 사 와."
여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범이는 검은 밴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연무야 어찌 됐든, 저 블랙박스가 여화 쪽을 계속 겨누고 있는 게 거슬렸다. 범이는 직원 하나를 불러 자재 더미를 입구 앞에 높이 쌓게 했다.
* * *
밴 안에서, 연무는 운전대에 이마를 팍 박았다.
그 맨눈과 마주친 순간,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진짜 본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휴대폰이 울렸다. 매니저였다. [형 차 어디 있어요? 저 내일 아침에 그 차 써야 하는데……] 연무는 답장 대신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데뷔하고 지금까지 수천 번 카메라 앞에 섰고, 수만 명 앞에서 무대 인사를 했다. 한 번도 떨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저 공사장 문 하나를 못 넘어서, 연무는 밴 안에 갇혀 있었다.
그대로 두 시간이 지났다.
들어갈까. 말까. 뭐라고 하고 들어가지. 지나가다 들렀다고? 성수동을? 촬영도 없는 평일 오후에? 매니저 밴을 혼자 끌고?
결국 연무가 생각해 낸 핑계는 피자였다. 대표님이 문자로 보내 준 '필승 전략'이기도 했다. 근처 피자집에서 라지 사이즈 열 판을 양손 무겁게 사 들고서야, 연무는 뻔뻔하게 공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고생 많으십니다. 이거 좀 드시고 하세요."
자재를 나르던 덩치들이 일제히 연무를 보았다. 범이네 클럽 직원들이었다. 누군가 "어, 강연무다" 하고 중얼거렸고, 피자 상자가 순식간에 동났다.
"어, 연무 왔냐?"
범이가 팔짱을 낀 채 다가왔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형, 오랜만이에요. 지나가다가요."
"성수동을? 평일 오후에? 혼자?"
두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짜낸 핑계를, 범이는 단 세 마디로 박살 냈다. 연무는 톱스타답게 완벽한 포커페이스로 웃어 보였다.
"네, 형. 지.나.가.다가요."
"그래? 그럼 피자 잘 먹을게."
범이는 연무의 어깨를 두 번 툭툭 치고 지나갔다. 동생 놈 기특하다는 듯한, 아무 사심 없는 손길이었다.
연무는 웃는 얼굴 그대로 어깨를 털었다. 범이 형. 입으로는 형이었다. 속으로는 단 한 번도 형이었던 적이 없었다.
여화가 대표실에서 나와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연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 입 베어 물더니, 오물오물 씹다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맛있네. 다들 많이 먹어."
그 한마디에 덩치들이 일제히 "네, 누님!" 하고 고개를 숙였다. 여화는 피자를 든 채 다시 대표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고맙다는 눈인사조차 끝내 연무에게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연무는 또 서성였다.
휑한 사무실에 시멘트 기둥과 벽, 문이 세워지는 사흘째였다. 아직 정리도 안 된 대표실 안쪽, 덩그러니 놓인 회장님 의자에 여화가 앉아 있었다. 오픈숄더 니트 위로 가느다란 쇄골 라인이 드러나 있었다. 하얀 뺨을 팔걸이에 기댄 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군대 면회 날이 떠올랐다. 민트색 원피스를 입고 위병소 앞에 나타났던 누나. 그날 연무는 생일이었고, 소대장한테 매달려 겨우 외출을 따냈었다. 누나가 웃던 그 얼굴 하나로 남은 군 생활을 버텼다. 그때보다 누나는 더 하얘졌고, 더 말라 있었다. 어디가 아팠던 것처럼.
유학 생활이 그렇게 힘들었나. 연무는 괜히 마음이 쓰였다.
연무는 대표실 밖을 맴돌았다. 시선이 몇 번 마주쳤다. 그때마다 연무는 웃어 보이고는 괜히 벽을 살피거나, 천장의 시스템 에어컨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대표실 문 옆, 시멘트 포대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난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금박 리본이 늘어져 있었다. [祝 發展 — 진도원]
경제 뉴스에서나 보던 이름이었다. 재계 1위 그룹의 막내. 그런 사람이 왜, 간판도 안 단 누나 회사에. 연무는 리본 끝을 한참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강연무?"
"어, 어?"
그제야 연무는 제대로 여화를 보았다. 여화가 팔걸이에 턱을 괸 채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할 말 있어?"
"내…… 가?"
"아니야?"
여전히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는 여화. 살짝 눌린 하얀 뺨을 보다가, 연무는 피식 웃어 버렸다. 돌려 말할 줄 모르는 그 무심함이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흐음…… 그 웃음은 무슨 의미일까."
"어…… 음, 아냐. 근데 여기는 왜 아직 공사가 이 모양이야? 사흘째라며."
연무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범이가…… 내가 인테리어 하면 시커먼 지하실처럼 만들어 버릴 거라고 해서 말이지."
범이. 그 이름이 누나 입에서 나오자마자 속이 부글거렸다.
윤태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누나 곁을 지켰다는 남자. 이번에도 누나를 데리러 그곳까지 날아갔다는 남자. 누나 옷장에 걸린 옷이며 머리핀 하나까지 다 그 놈이 골랐다는 걸, 연무는 대표님한테 들어서 알았다. 세상 사람들에겐 차갑기로 유명한 탑스타가, 그 놈 앞에서는 매번 열등감에 속이 뒤집혔다.
그런데 분했다. 맞는 말이라서.
시멘트의 회색빛 속에서도 저렇게 빛나는 사람인데, 온통 검은 공간에 두면 얼마나 눈이 부실까. 빛 한 줄기 닿지 않는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조개가 아주 잠깐 입을 열어 숨겨 둔 진주빛을 터뜨리는 순간처럼. 그 빛을 본 사람은 평생 그 바다를 못 잊겠지. 내가 그랬듯이. 인정하기 싫었지만, 범이 형은 누나를 너무 잘 알았다. 연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팔걸이에서 손을 뗐다.
"그 끄덕임…… 왠지 좀 기분 나쁜데?"
"푸흡. 어떻게 미대를 갔어?"
"야! 너……."
"여긴 그럼, 뭐 하는 곳이야?"
유학 갔다 돌아와서도 딱히 뭘 할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돌아오자마자 회사를 차린다고 했다. 대표님한테 영상 디자인 회사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여화가 피식 웃으며 연무를 올려다보았다.
"그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어? 너, 벌써 두 시간째 서성거리는 중이거든? 밖에 차 안에 있던 거까지 치면 네 시간이고."
"어, 어? 벌써 그렇게 됐나?"
연무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차 안에 있던 것까지. 역시 아까 그거, 우연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걸까.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누나 보느라, 시멘트 먼지 냄새뿐인 이 공간에서 어쩌면 연무에게만 맡아지는 건지도 모르는, 누나의 은은한 체취가 너무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을 뿐이었다. 들켰다는 게 창피한데, 또 이상하게 좋았다. 누나가 날 보고 있었다는 거니까.
"뭐…… 사실, 그냥 애들이랑 같이 모이고 싶어서 만든 데야."
여화가 팔걸이에 턱을 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같이 학교 다닌 애들. 다들 하고 싶은 거 못 하고 살더라. 디자인한 애는 편의점 야간 알바하고, 영상 하던 애는 남의 결혼식 찍고. 똘끼 가득한 애들이었는데, 먹고사느라 그걸 다 접어 두고 있는 게…… 걸려서. 꿈 가득 안고 배웠는데."
나른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안에, 연무가 모르는 무게 같은 게 묻어 있었다. 남의 사정을 오래 지켜본 사람만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유학 15년이 사람을 저렇게 만드나. 연무는 누나의 입술을 멍하니 보았다.
"그래서 걔들 하고 싶은 거 하게 해 주려고. 나도 그렇고."
그 순간, 연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영상 디자인 회사. 막 시작하는 회사. 클라이언트 하나 없는 회사. 그리고 여기, 아시아에서 제일 비싼 얼굴이 하나.
"누나."
연무가 대표실 문턱을 넘어 성큼 다가섰다. 피자 같은 핑계 말고, 누나 옆에 있어도 되는 진짜 이유가 처음으로 생긴 얼굴이었다.
"누나 회사 첫 광고, 내가 찍을게."
톡, 톡. 뺨을 두드리던 여화의 손가락이 멈췄다.
"……뭐?"
"모델료 안 받을게. 노개런티~! 누나 회사 포트폴리오 첫 장, 강연무로 박아. 그럼 업계에서 바로 연락 올걸?"
공짜라는 말에, 여화의 눈이 아주 잠깐 반짝였다. 연무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보다 완벽한 핑계는 없었다. 촬영 회의, 시안 회의, 현장 촬영. 합법적으로 누나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몇 달은 생기는 거였다.
그런데 여화의 표정이 이상했다. 기뻐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잠깐, 목덜미를 만지작거렸을 뿐이었다.
"촬영이면……."
여화가 천천히 연무를 올려다보았다.
"카메라 앞에, 나도 서야 해?"
연무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무슨 그런 걱정을.
"누나가 왜 서. 누나는 대표님인데. 모니터 앞에 앉아서 컷만 외치면 돼."
"……현장엔 있어야 하잖아."
"당연하지. 누나가 없으면 내가 거길 왜 가."
여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연무를 아주 오래 보았다. 무언가를 계산하는 사람처럼.
그러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또각, 또각. 여화가 연무 앞까지 걸어왔다. 한 뼘. 연무는 숨을 멈췄다. 여화가 손을 뻗어, 아까 범이가 툭툭 치고 간 연무의 셔츠 어깨를 손끝으로 털어 주었다. 그 체취가 훅 끼쳐 왔다.
"좋아. 찍자."
"지, 진짜?"
"대신 조건이 두 개."
여화가 손가락 하나를 폈다. 연무의 눈동자가 그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카메라 위치는 내가 정해."
연무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화가 두 번째 손가락을 펴더니, 그 손끝으로 연무의 가슴팍을 툭 밀어냈다.
"촬영 끝날 때까지,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마. 일이야, 이건."
연무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18년 동안 바란 게 딱 하나뿐인 남자한테, 그걸 바라지 말라니. 게다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인생의 법칙 아니겠는가.
연무는 밀려난 한 걸음을 도로 좁혔다.
"……누나. 그거, 지키기 무지하게 어려울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