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부운(浮雲)
von Jiungine
인정(人定)이 울리기 전 지웅은 금군 다섯을 데리고 창경궁으로 넘어갔다. 오늘 번(番)은 금군 이장 신위대(申威大)였다. 알고 보니 본관이 평산(平山)이고 파(派)만 다른 두 살 동생이었다. 착하고 성실한데다 무예도 뛰어나서 친 동생처럼 생각하는 녀석이었다. 연산군의 옆에서 호위를 하고 있을 텐데 변덕이 심한 주상 옆에서 무슨 일은 없을지 걱정이었다. 창경궁 함안문(咸安文)을 넘을 무렵 안 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연산군의 목소리였다. 지웅은 발길을 서둘렀다.
“뭐 하느냐? 매우 치지 않고. 정녕 목이 달아나고 싶으냐?”
환경전(歡慶殿) 앞 뜰에서 연산군이 하얀 저고리를 풀어 헤치고 칼을 들고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옆에는 비웃음을 흘리면서 장녹수가 서 있었고 그 뒤에 신위대가 침울하게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뜰에는 두 개의 거친 삼베로 만든 커다란 자루가 있었고 그 안에는 무엇인가 담겨 있었다. 자루는 마치 살아있는 짐승인 양 가늘게 떨리며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안양군 이항(安陽君 李㤚)과 봉안군 이봉(鳳安君 李㦀)이 벌벌 떨며 서 있었다. 그들 손에는 몽둥이가 쥐어져 있고 봉안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항, 이봉, 너희 두 놈이 치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서 쳐라.”
연산군은 한 손에 칼을 들고 손을 떨고 있는 이봉의 손에 몽둥이를 다시 쥐어 주었다. 외방에 부처하라더니 그새 변덕이 끓어 불러낸 것이었다. 장 80대를 맞은 이항과 이봉은 피가 번지는 엉덩이의 고통도 잊은 채 엉거주춤 중심을 잡으며 버티는 중이었다. 이봉이 몽둥이를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전하. 어찌하여 이러시나이까. 살려 주시옵소서. 전하.”
이봉이 울먹이며 애원하자 연산군이 싸늘하게 비웃으며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살려 달라? 아마도 이십 몇 년 전엔 누군가도 그렇게 애원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듣지 않았지. 어서 쳐라. 치지 않으면 너희들의 목을 칠 것이다.”
연산군이 칼을 들고 당장이라도 내려 칠 것처럼 겁박을 하자 이항이 몽둥이를 쳐들더니 ‘으아아’ 소리를 내며 자루를 힘껏 쳤다. 자루 안에서 끅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항은 실성한 듯 연이어 계속 자루에 몽둥이질을 했다. 퍽퍽퍽 소리를 내며 자루는 곧 아무 움직임이 없이 축 늘어졌다. 그제야 이항은 몽둥이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옆 자루에 있던 물체가 발버둥 치며 신음소리가 커졌다. 이봉은 그게 무엇인지를 눈치 채고 하염없이 울었다. 연산군이 이봉의 어깨를 발로 찼다.
“이런 육시를 할 놈을 봤나. 어서 몽둥이를 들고 치란 말이다. 어서, 어서.”
연산군은 쓰러진 이봉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밟았다. 이봉이 끝까지 몽둥이를 들지 못하자 연산군은 흥분하여 이봉을 계속 발로 찼다. 이봉의 코에서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지는지 둔탁한 소리만 들렸다. 연산군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주위를 둘러보더니 지웅을 보고 손짓을 했다.
“무극, 이리 오라. 이리 와서 저것을 매우 쳐라.”
지웅은 저 자루들이 이항과 이봉의 어머니인 엄 숙의와 정 소용이 들어있음을 깨달았다. 주상이 몽둥이를 지웅의 손에 쥐어 주었다. 지웅은 이를 악물었다. 잘못하면 죽거나 옥에 갇힐 수도 있었다. 지웅이 주저하자 장녹수가 다가오더니 몽둥이를 뺏어 들고는 소리쳤다.
“뭐 하러 다른 사람 손을 빌려요. 여기 놀고 있는 손도 많은데.”
그러더니 몽둥이를 들고 이봉 앞에 있는 자루를 힘껏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맺혔던 울분을 풀기라도 하는 듯 매질에 자비가 없었다. 체구가 작은 여인인지라 자루는 한참을 맞고서야 신음소리가 멎었다. 연산군이 두 자루속의 물체를 발로 이리 차보고 저리 차봐도 죽은 듯 반응이 없자 그제야 연산군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피에 굶주린 야차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함안문 근처에선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급 내관들이 한두 명 흩어지더니 사라졌다.
“잘했다. 잘했어. 역시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건 녹수 그대뿐이다. 무엇이 갖고 싶으냐. 내 염라대왕 수염이라도 뽑아 오라면 뽑아 올 것이다. 하하하.”
연산군은 장녹수를 끼고 덩실 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항은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하염없이 울고 있었고, 이봉은 피를 흘리며 실신해 있었다. 장녹수가 술병을 건네주자 연산군이 술병을 입에 대고 나발을 불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무극, 자네는 내 명을 어기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내 오랜 벗으로 이번만은 눈감아 주지. 다음엔 목이 달아날 것이다. 내수사 어디 있느냐?”
연산군이 내수사를 찾자 미리 연통이 있었는지 별좌 두 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앞으로 나섰다.
“저 쳐 죽일놈은 칼을 씌워 옥에 가두고 저 자루들은 갈가리 찢어 젓갈을 담그도록 해라. 내 명을 따로 내릴 터인 즉, 그때 산과 들에 새 먹이로 던져 줄 것이다.”
연산군은 말을 마치고 이항을 일으켜 세우더니 끌고 환경전 서쪽으로 향했다. 서쪽엔 대왕대비 마마의 처소가 있는 경춘전(景春殿)이 지척이었다. 아까 흩어졌던 내관 무리들을 보았을 때 이미 인수대비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었다. ‘경사스러운 봄‘이라는 뜻을 가진 경춘전에 결코 경사스럽지 않은 피바람이 불어가는 중이었다. 지웅은 참담했다. 주상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 사실이 대신들에게 알려지면 충분히 반정(反政)이 일어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웅은 주상의 팔다리를 자르지 못하면 지웅 자신의 팔다리가 잘려 나갈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금군들을 향해 이봉을 옥에 가두고 주상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호위할 것을 주문하였다. 내수사 별좌들이 자루를 풀어 안에 든 엄 숙의와 정 소용이 모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수레에 끌고 사라졌다. 지웅은 경춘전으로 넘어갔다.
인수대비의 지밀상궁이 밖에 나와 대기하고 있다가 연산군이 나타나자 긴장한 듯 허둥대며 주상전하 입시를 알렸다. 안에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연산군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흑화(黑靴)를 신은 채로 마루에 오르더니 그대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손엔 벽사검을 든 채였다. 인수대비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침상을 앞에 두고 보료(褓襚)에 앉아 있었다. 인수대비는 매섭게 손자 연산군을 쏘아보았다. 그 모습을 본 연산군은 비웃음을 날리며 인수대비 앞에 턱 하니 앉았다. 한 손엔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엔 뒷덜미를 잡힌 이항이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 콧물과 눈물과 옷에는 핏자국이 바지엔 오줌을 지린 자국이 있었다. 병색이 짙어 가쁜 숨을 가끔씩 몰아쉬던 인수대비는 술 냄새와 피비린내를 맡으며 이 나라 종사가 끝나감을 감지했다.
"할마마마, 보십시오. 할마마마께서 애지중지하시던 손자가 여기 왔습니다. 이 아이의 손에 묻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인수대비는 점점 떨리는 손으로 침상을 짚으며 이항의 몰골을 보았다. 이항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이항 못지않게 연산군도 몰골과 행색은 가관이었다.
"융(隆)아... 네가 정녕 미쳤구나. 대관절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시킨 게냐! 신성한 궁궐에서 이 무슨 망측한 피칠갑이란 말이냐!"
"망측하다니요? 저는 그저 효도를 가르쳤을 뿐입니다. 할마마마와 저 여우들이 내 어머니께 사약을 내릴 때, 그분께서 흘리신 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항! 어서 네 할머니께 말씀드려라. 네가 방금 뜰에서 누구를 죽이고 왔는지!"
"대왕대비마마... 소손을 죽여주옵소서! 저 자루 속에... 자루 속에 제 어미가... 제 어미가 들어있었습니다! 소손이 제 손으로...!"
인수대비의 눈이 경악으로 뒤집혔다. 연산군은 통곡하는 이항의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들어 올리며 대비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들으셨습니까? 할마마마가 세우신 그 견고한 '예법'과 '도리'가 오늘 이 아이의 몽둥이질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어머니를 죽인 죄를 그 자식에게 묻게 했으니, 이보다 공평한 인과응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 이제 할마마마 차례입니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할마마마는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연산군은 급기야 병석의 대비를 향해 위협적으로 몸을 날렸다. 겁에 질린 궁녀들이 비명을 질렀으나, 연산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비의 보료를 걷어찼다.
"어머니를 살려내란 말입니다! 죽어서라도 가서 내 어머니께 무릎 꿇고 비십시오! 할마마마가 돌아가시기 전엔, 이 궁궐의 피 냄새는 절대 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인수대비가 침상위의 서책을 집어 연산군에게 던졌다. 책 한권이 연산군 앞에 떨어졌다. 겉에는 ‘내훈(內訓)’이라고 적혀있었다.
“아녀자들이 읽어야 할 내훈이니라. 돌아가서 그 책이나 읽고 공부하거라. 일개 여염집 아녀자보다도 못한 왕을 두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참담하도다.”
연산군은 분노한 대비의 말을 듣고 눈이 뒤집혔다. 연산군은 흥분하여 이성을 잃고는 ‘에잇’하며 그대로 대비의 가슴을 이마로 받아버렸다.
인수대비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연산군은 칼을 침상 위에 힘껏 내리쳐 칼을 꽂았다. 그리고는 방구석 문갑위에 있던 베 한 필을 들어 이항에게 던졌다.
“이것은 네 할미가 상으로 주는 것이다. 받아 가거라.”
연산군은 칼을 빼어 들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뜰 아래로 내려섰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장녹수는 주상의 팔을 부축하여 경춘전을 나섰다. 신위대가 지웅을 흘낏 보더니 주상의 뒤를 이었다. 밖에 있던 제조상궁과 지밀상궁, 궁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 어의를 부르라는 제조상궁의 목소리가 울리고 궁녀 하나가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안에서 통곡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이항이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베 한 필을 가슴에 들고 천천히 나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실성한 모습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사라졌다. 지웅은 벌레 씹은 느낌이었다. 이게 과연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린 지웅은 금군들에게 신호하여 경춘전을 나섰다.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삼월 스무날이었다.
다음 날 지웅은 조반(朝飯)을 마치고 내반원(內班院)에 들러 판내시부사의 일정을 들었다. 날쌘 금군 한 명을 시켜 서찰 하나를 판내시부사 댁에 보내고 저녁에 뵙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금군은 빠르게 달려 김처선의 집에 당도하였고 지웅의 말을 전하고는 서찰을 넘겼다. 목마른 금군에게 물 한 바가지 적선해 준 김처선은 서찰을 꺼내 읽어 보았다.
昏夜已極 (혼야이극) - 어두운 밤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欲待曉日 (욕대효일) - 새벽의 해를 기다리고자 합니다.
願隨大義 (원수대의) - 간절히 대의를 따르기를 원하오니,
同心回天 (동심회천) - 마음을 합쳐 무너진 하늘을 되돌립시다.
서찰을 읽은 김처선은 아랫것을 시켜 박원종의 집과 유순정(柳順汀)과 성희안(成希顔)의 집에 각각 서찰을 보냈다. 마당에 있는 벚꽃 나무에 눈이 부풀며 새 순이 돋고 있었다. 김처선은 저 벚꽃이 피기 전에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술시(戌時)가 약간 넘은 시각, 지웅은 말을 달려 김처선의 집에 도착하니 해가 인왕산 자락을 힘겹게 넘어가고 있었다. 호문(呼門) 하자 나이 먹은 가노(家奴)가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집 마당과 담장 밖엔 어디서 차출했는지 왈패 무리로 보이는 험상 궂은 사내들이 지키고 있었다. 별채로 안내되어 들어가니 이미 모두들 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세 사람이 더 있었다. 전에 보았던 박원종, 김계창, 이공신 말고도 정2품 공조판서 유순정(柳順汀), 그리고 지웅이 평소 존경하고 흠모하던 성희안成希顔), 마지막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자광이었다. 지웅은 김계창과 이공신에게 목례로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았다. 면면을 보니 화려했다.
유순정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외교와 국방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지중추부사를 겸직하고 있는 유순정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 연이은 실정(失政)으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지웅은 유순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내금위장 무극, 인사드립니다. 대감.”
같이 고개를 숙인 유순정이 지웅을 믿음직스럽게 쳐다보았다. 이 모임을 주도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성희안이었다. 그는 종2품 이조참판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연산군이 연회를 베풀어 신하들과 시를 지을 때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풍자하는 시를 지어 종9품인 부사용(副司勇)으로 14단계나 강등(降等)된 인물이었다. 18단계의 직급 중에서 최하위 말단이었다. 당시 풍자시가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어 지웅도 잘 알았다.
金屋銀屛曉色鮮(금옥은병효색선) - 금으로 치장한 집과 은 병풍에 새벽빛이 선명한데,
玉樓歌管醉如仙(옥루가관취여선) - 옥루에서 들리는 노래와 피리 소리에 신선인 듯 취했구나.
莫言此地無秋意(막언차지무추의) - 이곳에 가을의 기운(서늘한 심판)이 없다 말하지 마라,
白露橫江是一年(백로횡강제일년) - 흰 이슬 강에 비껴 내릴 때면 한 세월(영화)도 다 가리라.
연산군은 시적 표현이 아름다워 처음엔 감탄하다가 금옥은병(金屋銀屛)이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을 뜻하고 취여선(醉如仙)은 연산군의 주색잡기를, 추의(秋意)가 가을이 가져다주는 심판과 몰락을 의미하며, 백로(白露)는 차가운 이슬로 권력의 종점을 노래했음을 깨달은 연산군이 대노(大怒)하여 상을 뒤엎고 그날로 성희안을 종9품 부사용으로 좌천시킨 일이었다. 그런 성희안을 직접 보게 된 지웅은 오랜 스승을 만난 듯 반가웠다.
“신(臣) 내금위장, 대감을 직접 뵙게 되어 무한한 광영이올시다. 소신 관유고저(官有高低) 주미일야(酒味一也)의 고사를 익히 알고 있나이다.”
지웅이 성희안을 보고 인사를 하자 성희안이 껄껄 웃으며 화답했다. 사람 좋은 표정을 가진 얼굴이었다.
“늙은이 술주정이 온 동네 소문이 났구려. 허허허. 나 독곡(獨谷)이라 하오.”
독곡(獨谷)은 성희안의 호(呼)였다. 이조참판을 지내던 권세가가 하루아침에 궐문을 지키는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되었어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소매에 술병을 넣고 다니며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어느 날 연산군이 문을 지나가다 성희안을 보고 ‘참판 노릇하다가 궐문이나 지키고 있으니 어떠하냐?’라고 묻자 ‘관직의 높고 낮음은 있으나, 술맛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사옵니다.’ 하는 대답으로 태연하게 연산군을 당황시킨 일화가 있었다. 지웅은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성희안에게 말한 것이었다.
유자광은 전혀 예상 못한 인물이었지만 너무도 태연하게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지웅은 혼란스러웠다. 저 자의 정체성이 의심스러웠다. 혹여 주상에게 역모(逆謀)라며 고변(告變)이라도 한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에 처 해질 것이었다. 무오년 사화때 유자광이 한 짓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바로 오늘 오전만 해도 동생의 구명을 나 몰라라 했던 위인이었다. 지웅이 먼저 인사를 했다.
“판의금부사 대감, 여기서 또 뵙습니다.”
“하하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내금위장. 떠들기 좋아하는 저잣거리 기집들처럼 사림이니 훈구니 편 가르더니 이제는 왕실의 궁중파냐 부중파냐 하면서 또 편을 가르지 않소. 그렇게만 본다면 나야말로 부중파 아니겠소? 저기 계신 박원종 대감도 있는데 말이오. 하하 아니 그렇소?”
유자광의 말에 박원종이 거들었다.
“내금위장. 유 대감은 우리의 세작(細作)이오. 우리의 계획에 함께 하기로 했으니 경계할 필요 없소.”
그때 문이 열리더니 김처선이 들어왔다. 며칠 새에 부쩍 더 늙은 느낌이었다. 팔십 중반이니 살 만큼 살았으나 여전히 술을 좋아해서 젊은 사람 못지않게 술을 마셨다. 김처선은 앉자마자 지웅을 소개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내금위장 신지웅 대감입니다. 우리에겐 꼭 필요한 인재지요. 우리와 함께 하기로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시간과 인원입니다.”
“신수근 대감은 뭐라고 하십니까?”
“내 직접 만나서 은밀히 물어보았소만 뜻이 맞지 않았소. 하는 말이, ‘내 사위를 위해 누이를 배신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 아니겠소.”
신수근(愼守勤)은 연산군의 정실 거창 신씨(居昌 愼氏)의 친오빠이자 왕대비인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훗날 중종)의 장인이었다. 박원종이 신수근에게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을 추대하자고 제의했던 것이었다. 잠시 관직을 나가 있다가 종4품 돈녕부(敦寧府) 첨정(僉正)이라는 의외로 낮은 직에 제수되어 돌아온 신수근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지금의 현 상황에서 자칫 실패할지 모를 반역의 무리에 끼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 돈녕부(敦寧府) 첨정(僉正)은 왕실의 친인척 관리를 담당하는 부서로 종묘나 사직의 제사, 국정 운영 같은 실질적인 행정 업무는 하지 않았고 실제 권한도 없이 그저 왕실 친인척을 예우하기 위한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미 이전 직책이 정2품 이조판서였다. 죄도 짓지 않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임금의 처남이 정2품에 있다가 나가서는 종4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웅은 신수근이 절대 반정의 계획에 동참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신수근은 2년 전 대간들의 상소가 있었음을 기억했다. ‘오랫동안 이조(吏曹)를 맡아 거리낌 없이 방자하였으며, 뇌물이 폭주(輻湊)하여 문정(門庭)이 저자와 같았고, 조그만 원수도 남기지 않고 꼭 갚았다. 주인을 배반한 노비(奴婢)들이 다투어 와서 그에게 투탁(投托)하였으며, 호사(豪奢)를 한없이 부려 참람됨이 궁금(宮禁)에 비길 만했다’는 내용의 상소였다. 그 때문에 사직을 하고 나가 있다가 이번에 종4품으로 들어온 이유는, 연산군은 자신의 폭정을 지지해 줄 확실히 자기편인 매형이 필요했고 견제와 감시가 뜸한 왕실 친인척 관리직인 돈녕부 첨정을 맡겨 다시 고위직으로 정식 승차 발령을 내기 위한 기틀을 다진 것이었다. 정2품이나 종4품에 상관없이 신수근은 이미 임금의 총애를 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어젯밤 소식은 들었습니까?”
이공신이 묻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모두들 이미 들어 알고 있기에 참담한 표정이었다. 김처선이 입을 열었다.
“주상의 패악이 도를 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계비라 하나 선대왕의 후궁입니다. 자식들 손을 빌려 몽둥이로 패 죽였어요. 선불가실 악불가장(善不可失 惡不可長)이라 했으니, 선(善)은 잃어서는 안 되고 악(惡)은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대감.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이라 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넓어 성긴 듯하지만, 결코 놓치는 법이 없지요. 역사에 낱낱이 기록되고 있으니 이제 우리가 심판을 해야 합니다.”
유순정 대감이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쥐며 말했다. 성희안이 말을 받았다.
“일찍이 노자(老子)께서 ‘만족할 줄 알면 부끄럽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하였거늘 작금의 주상은 그저 미친개에 지나지 않소. 미친개엔 몽둥이가 약이지 않습니까?
지웅은 현실적인 대안 없이 탁상공론(卓上空論)만 하는 대감들이 안타까웠다. 그저 혈기만 내세워서 되는 게 아니란 걸 모르지 않는 사람들이건만 누구 한 명 선뜻 대책을 세우는 이가 없었다. 지웅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는지요.?“
”말씀하시오. 내금위장“
김처선이 대답하자 지웅이 살짝 목례를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거사는 혈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줄 아옵니다. 대의를 외치는 목소리만으로는 저 궁궐의 담장을 넘을 수 없습니다. 내금위장으로서 내가 매일 보는 것은 주상의 광기뿐만이 아니라, 그 광기를 지키는 서슬 퍼런 칼날들이니 이 거사는 한낱 객기로 성공할 수 있는 도박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 그리고 종묘사직을 살리기 위해 지금 당장 고민해야 할 건 다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치밀한 계획(計)입니다. 어느 문으로 진입하여 누가 주상을 확보하고, 어느 곳에서 누가 임사홍과 신수근의 목을 칠 것인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합니다. 궁궐 지도는 내 머릿속에 있으나, 각 부대의 동선이 겹치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칼에 죽게 될 것입니다. 해서 아군(我軍)끼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식을 해야 합니다.
둘째, 정확한 시간(時)입니다. 파루가 울리기 전, 금군이 교대하는 틈을 타야 합니다. 단 일각(一刻)이라도 늦어지면 역풍을 맞을 것이니, 우리의 신호는 한 치(一寸)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셋째, 확실한 인원(人)입니다.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은 필요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입이 무거운 결사대로 최소 500명이 필요합니다. 내금위 내에서 포섭할 수 있는 자와 훈련원에서 동원할 장정들의 명단을 계산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막대한 자금(財)입니다. 군사들의 입을 막고, 거사 당일 성문을 열어줄 수문장들을 매수하며, 궐 밖에서 지원할 병장기를 갖추는 데 필요한 재화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들의 배를 채우고 거사가 성공해도 한 달은 질서를 잡아 줄 재화 말입니다. 돈 없는 반정은 배고픈 호랑이를 사지로 모는 격이니, 각 가문의 곳간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듣고 있던 박원종이 박수를 치며 껄껄껄 웃었다.
”과연 문무(文武)를 동시에 수석으로 급제한 천재답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하하하.“
”한 마디로 계시인재(計時人財)라. 우리 거사의 기본틀을 잡아 주셨구려. 좋은 말씀 고맙소 내금위장. 지금은 당파를 초월해서 반정에 호의적이면 모두 품어야 합니다. 이제 각자의 역할을 나눠 봅시다. 우선 내시부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간신 김자원을 제외한 내시부는 나 김처선이 있는 한 일심동체 올시다. 병권(兵權)을 가진 임사홍이 제일 문제인데,,,“
“의금부(義禁府)는 제가 통제하면 되고 내삼청(內三廳)은 내금위장이 있으니 걱정이 없소만, 병조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 했으니 임사홍의 약점을 잡아 주상에게 고변하면 되지 않겠소이까?”
유자광이 그럴듯한 방법을 냈다. 지웅도 그 방법이 제일 유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던 김계창이 말했다.
“어제 죽은 엄 숙의와 정 소용마마의 가장 친했던 이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임사홍입니다. 임사홍 또한 죽은 폐비와의 사사(賜死)와 무관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피 묻은 적삼을 들고 와서 주상의 칼을 피해갔습니다. 엄 숙의와 정 소용 마마와의 관계로 엮는다면 임사홍을 쳐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누가 받아도 병조를 받을 수 있겠지요.”
좋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방법이었다. 지웅의 마음을 읽은 듯 이공신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전회의 시간에 대놓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자,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서 파도가 몰아치듯 한 방에 끝내야 합니다. 내금위장이 말씀하셨다시피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진행되는 거사가 아니면 우리 모두 목을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러니 치밀하게 계획부터 세웁시다.”
김처선이 지금은 아니라는 듯 제동을 걸었다. 지웅이 보기엔 한 달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노쇠한 김처선은 돌다리도 두들기고 가는 성격이었다. 거사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안한 요소가 많을 터였다. 배신자가 생기기도 하고 변수가 나타나기도 한다. 지웅은 김처선이 생각하는 거사일이 궁금했다.
“그럼 대감, 거사일을 언제쯤으로 생각하시는지요?”
지웅이 묻자 김처선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 년 후면 적당할 듯하오. 내금위장 말대로 결사대도 훈련시켜야 하고 병장기도 준비해야 하니 내 년 이 맘 때쯤으로 정하면 될 것 같소.”
“대감, 너무 깁니다. 거사란 닭 모가지 비틀 듯 바로 해야 합니다.”
역시 무관답게 박원종이 불가함을 외쳤다. 모두들 한목소리씩 내놓았지만, 의견이 좁혀지지는 않았다. 지웅은 불안했다. 일 년이면 너무 길었다. 최후의 조건은 물리력이었다. 다른 부분이 실패해도 버틸 수 있는 병력 확보는 제일 중요한 보루였다.
“대감, 그렇다면 제가 병력을 모아 훈련시키겠습니다.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결사대 오백 명을 준비하겠습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하여 산채를 짓고 군사들을 먹일 식량만 조달해 주십시오.”
“아니 그럼 내금위는 어찌합니까? 임금 옆에서 칼을 들고 호위하는 유일한 사람 아닙니까? 정 안되면 목이라도 베어야지요.”
성희안이 말하자 지웅이 다시 대답했다.
“내금위장은 박원종 대감이 맡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주상에게 추천하면 오히려 더 미더워 할 것입니다. 주상이 바보는 아닙니다. 내 목숨을 맡길 내금위장을 아무나 주지 않을 겁니다. 박원종 대감은 어찌 보면 사촌간이니 명분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지웅이 내금위장 까지 포기하는 걸 보고 감동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웅은 깨지기 쉬운 살얼음판에 있는 것 보다 군사를 훈련시키는 게 백번 나았다. 더구나 해란과 함께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내금위장이 아니라 임금 자리라도 기꺼이 내 놓을 수 있었다.
방에 모인 일행은 주안상을 들여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유자광은 술을 마시다가 지웅의 표정을 살피더니 기회를 봐서 홍승찬의 구명을 임금에게 주청하겠노라 약속했다. 그것만으로 고마웠다. 지웅도 주상에게 따로 구명을 할 생각이었다. 지웅은 행여나 오늘도 아란카가 등장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며 술을 마셨지만 오늘은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