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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주기 위한 대화 · 여덟 해 전의 하늘

von 나츠하나 · 2026-10-27

모래시계 · 잔량 33시간 00분 · 여행 6일차

테레사가 뒷방에서 만들어 온 점심은 빵과 치즈와 어제 남은 수프였다. 셔터 내린 가게 안에서 세 사람은 진열장 사이의 작은 탁자에 둘러앉았고, 접시가 비워지자 그대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첫 안건을 낸 도윤은 전제부터 정하자고 했다. "성하 폰에는 듣는 귀가 붙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증거는 없어요. 발열과 방전과 잡음뿐이니까. 그런데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니라고 치는 건 감정이 아니라 희망이고, 우리한테 희망으로 세울 계획은 없습니다." 반박이 없어서 규칙이 생겼다. 폰으로는 들려주고 싶은 것만 말한다. 진짜 말은 이 가게 안에서, 아니면 테레사의 낡은 유선 전화로, 아니면 종이로 한다. 종이는 쓰고 나면 태운다. 그것을 받아 적으며 성하가 중얼거렸다. "규칙 만들기는 원래 내 담당인데." 그 말투가 선언이나 다름없어서 규칙은 넷이 되었다.

다음 안건인 시간표는 테레사가 냈다. "각인은 모레 아침에 끝난다. 여드레째. 처음 약속 그대로." 그러니까 저들이 아는 일정의 끝도 모레 아침이었고, 그 전에 모든 것이 끝나 있어야 했다. 내일 새벽에 아르노 남쪽 언덕으로 간다는 것까지는 이 탁자에서 정해졌고, 어떻게 가는지는 오늘 밤과 내일 새벽에 정하기로 했다.

성하가 수첩을 펴고 회의록 첫 줄을 적은 뒤 반 줄을 덧붙이는 것을 도윤은 보았다. 나중에 성하가 보여준 그 반 줄은 그림책의 문장이었다. 발소리가 셋이 되자, 길이 덜 어두웠다.

"이제 내 무기." 도윤이 말했다. "나는 싸움은 모릅니다. 아는 건 물건값이에요. 그런데 이번 일의 한가운데 있는 게 마침 물건이고, 물건값에는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도윤은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선을 하나 그었다. "숨겨진 진품은 값이 없어요. 존재가 증명되는 순간부터 값이 생기고, 세상이 다 아는 순간부터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값이 됩니다. 저들은 사백 년 동안 그 반대를 믿었어요. 봉인해야 지켜진다고. 우리는 그걸 뒤집습니다. 그 종이는 은닉이 아니라 공개로 지켜집니다. 세상이 다 아는 물건은 죽일 이유가 사라진 물건이니까."

계획의 뼈대는 단순했다. 수고를 확보하는 즉시 사본을 만들고, 사본과 경위서를 여러 곳으로 동시에 보낼 수 있게 준비한다. 받을 곳은 경매업계의 옛 동료들과 대학의 아는 이름들, 그리고 기자 하나였고, 명단은 도윤의 머릿속에 이미 있었다. 발송은 묶어 둔 채 정해진 시각마다 신호를 보내 하루씩 미루고, 신호가 끊기면 그날로 전부 나간다.

말하면서 도윤은 일 년 전의 새벽을, 만년필이 종이를 떠나던 소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서명 한 번이 이 골목까지 그들을 데려왔다. 서명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은 감정의 제1원칙 옆에 늘 붙어 다니던 문장이었고, 취소할 수 없다면 방향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발송이 데려올 것은 그들이 아니라 세상이었다.

"신호는 둘입니다." 도윤이 말했다. "내 것 하나, 성하 것 하나. 둘 다 있어야 하루가 미뤄져요. 하나라도 빠지면 나갑니다."

성하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잡아도 소용없고, 당신을 잡아도 소용없게."

"둘 다 무사해야만 세상이 조용한 구조로." 도윤은 성하의 눈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지켜지는 쪽이 아니야. 이 체계의 절반이야. 그래야 저들 계산에서 '여자를 잡으면 남자가 접는다'는 줄이 지워져."

성하는 잠깐 생각하다가 수첩에 적으면서 말했다. "마음에 들어. 내 몫이 인질이 아니라 방아쇠라는 거."

이번 무기는 성하의 것이었다. "그쪽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 그 사람들은 닷새 동안 우리를 읽고 있었잖아. 독자야, 말하자면. 그리고 독자는 자기가 이미 믿는 이야기를 제일 잘 믿어." 성하는 수첩을 폈다. "그들이 믿고 싶은 우리는 이래. 보물찾기에 신난 관광객 커플. 모레 아침 각인된 선물을 찾아서, 짐 싸서, 비행기 타고 집에 가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줘. 원하는 결말이 오고 있다고 믿는 독자는 페이지를 서두르지 않아."

성하가 짠 대본은 일상의 소리여야 했다. 정보를 흘리는 티를 내서는 안 되고, 중요한 말일수록 덜 중요하게 해야 했다. "거짓말의 기술이 아니야. 이야기의 기술이야. 독자는 설명하는 문장을 의심하고, 지나가는 문장을 믿거든." 도윤이 대본 초안에 '모레 오전 열 시 출국 예정'이라고 또박또박 쓰자 성하가 그 줄에 가위표를 쳤다. "이러면 광고야. 시간은 컨시어지가 묻게 만들고, 우리는 대답만 해. 믿게 하고 싶은 건 상대가 말하게 하는 거야."

마지막 무기는 이 가게였다. 테레사는 말없이 일어나 뒷방 안쪽의 문을 열어 보였다. 도윤이 닷새째 짐을 풀어 둔 방의 벽장 뒤로 어른 하나가 지날 폭의 통로가 골목 반대편으로 빠져 있었다. "숨기는 것도 가업이라고 했지." 노인은 그것으로 설명을 끝냈다. 새벽에 탈 것은 시장에서 사십 년을 알고 지낸 청과상의 삼륜 트럭이었고, 전화는 카운터 밑에 다이얼이 달린 유선이 있었다.

도윤은 거기서 멈추고 말을 골랐다. "할머니. 이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저들 눈에 이 가게는…"

"중립이 아니게 되지." 말을 자른 테레사는 반 박자도 늦지 않았다. 이번에는. "알고 있다. 사백 년 동안 이 집은 구경꾼 자리를 지켰어. 지키는 일이란 게 원래 그래. 아무 편도 안 드는 척하면서 한쪽 편만 드는 일이지."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이제 구경꾼을 그만두런다. 사백 년 만에 처음으로 지키는 일이 숨는 일이 아니게 됐는데, 늙은이가 그 호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러니 그 얼굴 치우렴. 나는 설득당한 게 아니라 고른 거다."

성하가 탁자 밑에서 도윤의 손등을 한 번 눌렀다. 도윤은 노인의 옆얼굴을 보았다. 어제까지 이 가게의 위험은 그와 성하가 끌고 들어온 것이었지만, 오늘부터는 아니었다.

통화 전에 리허설을 한 번 했는데, 성하가 대본을 읽고 도윤이 컨시어지 역을 맡았다. 도윤의 컨시어지가 목석이어서 성하는 두 번 웃음이 터졌고, 테레사는 카운터 뒤에서 "그 호텔 망하겠구나" 하고 평했다.

오후 네 시, 성하의 폰이 다시 켜졌다.

두 건의 통화 중 첫 건은 호텔 컨시어지였는데, 공항 가는 차편을 알아봐 달라고 하고는 언제 출발이시냐는 물음에 그제야 모레 아침이라고 대답했다. 성하가 시킨 그대로였다. 둘째 건인 식당에는 내일 저녁 두 사람 자리를 예약하고 싶다고, 여행 마지막 만찬이라 창가면 좋겠다고 한 다음 디저트에 초를 하나 꽂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웃음도 초 이야기도 대본에는 없었다. 탁자 맞은편에서 도윤은 무대 뒤의 연출가처럼 성하가 통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끊기 직전에 성하는 액정을 들여다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를 했다.

"어? 폰이 왜 이러지."

이틀 전 밤에는 모르고 했던 말을 오늘은 알고 했다. 듣고 있는 귀들에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통화가 끝나고 폰이 다시 꺼지자 세 사람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성하였다. "독자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대사가 잘 나오네." 웃자고 한 말이어서 셋 다 조금 웃었다.

오후가 늦어지자 성하는 회의록을 덮고 선언했다. "업무 종료. 저녁 얘기는 저녁에 하기로 했지."

16시 2분, 대상 회선 활성. 통화 2건, 총 6분 40초. 감청 기록은 저녁 보고로 올라갔고, 요지는 두 줄이었다. 대상들, 모레 오전 출국 준비. 잔여 일정은 기념품 수령과 관광.

본부의 수신 확인은 짧았다. 시간표를 얻었으니 기다림에도 끝이 생긴 셈이었다. 안내인은 이틀 안에 길을 마저 걸을 것이었고, '걷지 않는다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아직 누구의 보고서에도 적히지 않았다.

다리오는 전달받은 감청 녹음을 들으며 요지를 자기 수첩에 옮겨 적다가 연필을 잠깐 멈췄다. 사흘 동안 들은 그 여자의 목소리보다 반 톤 밝은 목소리였다. 너무 깨끗한 통화였다. 요즘 위에서 원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시간표여서, 그 문장을 그는 적지 않았다. 17시 30분, 변동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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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여덟 해 전의 하늘

모래시계 · 잔량 27시간 00분 · 여행 6일차

가게를 나설 때 테레사가 두 사람을 문까지 배웅했다. 노인은 잘 다녀오라는 말 대신 성하의 옷깃을 여며 주고 도윤에게는 "하늘 욕심에 밤 새우지들 말고" 한마디만 했다. 등 뒤에서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는 어제와 같았지만 오늘은 배웅처럼 들렸다.

저녁의 강변에는 두 사람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같은 계단에 같은 방향의 강물이었고, 노점에서 산 빵과 튀김과 병째 든 와인이 있었다. 나흘 전에는 낯선 도시의 풍경이던 것들이 이제 손에 익어 있었고,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오늘의 두 사람이 같은 것을 알고 같은 쪽을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저녁이야." 성하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선언했다. "오늘 얘기, 시작."

시작하기 전에 성하는 낮에 식당에 부탁한 초 얘기부터 바로잡았다. "그거, 대사만은 아니야. 독자용 대사에도 진짜를 섞어야 힘이 생기거든. 초는 진짜야. 내일 저녁에 우리는 정말로 그 초를 켤 거고."

"자, 그럼." 성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 집 냉장고에 일정표 붙어 있던 거 기억해?"

기억했다. 도윤은 그 일정표를 지금도 외우고 있었다. 팔월 십이일 칸에는 별표가 하나 있었는데, 물어도 성하는 비밀이라며 웃기만 했다.

"오늘이 그 별표야." 성하가 말했다. "여덟 해 전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난 밤에 유성우가 왔었잖아. 그게 해마다 오는 거 알아? 팔월 십이일하고 십삼일 사이. 극대기래.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이 있었어. 여덟 해가 되는 해에, 그 하늘을 당신하고 다시 보기. 서울은 하늘이 탁하니까, 어디 멀리서. 그래서 여행이 팔월 칠일부터 십오일인 거야. 십이일이 한가운데 오게. 이 여행은 처음부터 오늘 밤을 위해서 있었어."

도윤은 말을 잃었다. 일 년 전 그는 이 여행을 성하의 즉흥이라고 생각했고, 캐리어를 끌고 혼자 공항으로 가던 뒷모습도 급한 성격 탓으로 돌렸다. 부고 뒤에는 자신이 놓친 휴가라고 여겼다가 그다음 일 년 동안은 자신이 죽인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전부 틀렸다. 이 여행은 팔 년짜리 계획이었고, 별표 하나에 담긴 그 계획을 그는 두 번의 여름을 건너서야 알게 되었다.

"그 밤을 다시 보여주고 싶었어." 성하는 강 건너 하늘을 보았다. "당신은 그날 하늘을 반도 안 봤거든. 계속 나만 봐서."

"오늘도 그럴 예정인데." 도윤이 말하자 성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다가 도윤의 어깨에 이마를 박았다. "팔 년 만에 말이 늘었네, 서 감정사."

첫 별이 떨어진 것은 아홉 시가 되기 전이었다. 처음에는 하나가 긴 금을 긋고 사라졌다. 성하가 소리를 질렀고 강변 여기저기서도 비슷한 소리들이 터졌으며, 이어서 둘, 셋이 떨어지면서 하늘은 여덟 해 전처럼 열려 갔다. 강물 위로도 같은 금이 한 번 더 그어졌다.

별은 땅에 닿지 않는다. 닿기 전에 다 타 버린 것만이 빛으로 남는다. 도윤은 떨어지는 빛들을 보며 그 문장을 생각했고, 오늘 밤에는 그것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들렸다.

"소원 빌어야지." 도윤이 말하자 성하가 돌아보았다. 도윤은 여덟 해 전 언덕에서 들었던 말을 이번에는 자기가 돌려주었다. "빌 소원이 없으면 만들면 되죠."

성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내 대사야. 저작권 있어."

"사용료는 소원으로 낼게."

두 사람은 여덟 해 전의 규칙대로 했다. 첫 소원은 시시하게, 내일 아침 빵집에 크루아상이 남아 있게 해주세요였고, 두 번째는 조금 진심으로 빌 차례였다. 성하는 두 번째로 내년 그림책이 아주 조금만 팔리게 해주세요, 너무 팔리면 마감이 늘어나니까, 하고 빌었다. 도윤의 두 번째는 내일 저녁의 초가, 하는 데까지 절반만 나오고 뒤는 그가 삼켰다. 세 번째부터는 별이 떨어지는 속도를 소원이 따라잡지 못했다. 시시한 소원을 소리 내어 빌면서도 두 사람 다 소리 내지 않는 소원을 하나씩 품고 있었고, 그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

"이리 와 봐." 별 사이가 뜸해졌을 때 성하가 말했다. "할 게 있어."

성하가 수첩을 꺼내 펼친 페이지를 도윤도 보았다. 아이는 별을 따라가는 일을 그만두지 않기로 했다. 성하는 그 한 장을 소리 없이 뜯어 길고 좁게 접어 가다가 끝을 말아서 고리를 만들었고, 두 번 접자 반지가 두 개가 되었다.

"반지가 가게에 있잖아. 우리 별 재는 물건도 가게에 있고." 성하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가진 걸로 해. 규칙 발표할게. 서약 규칙 하나, 반지는 종이여도 말은 종이가 아니어야 한다. 둘, 증인은 저 위에 떨어지는 것들로 충분하다. 셋, 이건 가승인이야. 진짜 식은 구월 십이일. 그날 이 종이 반지를 진짜로 바꾼다. 이의 있어?"

"없어."

문장이 적힌 면이 바깥으로 오도록 성하가 도윤의 손가락에 종이 반지를 끼웠고, 도윤이 나머지 하나를 성하의 손가락에 끼웠다. 이번에 손이 떨리는 쪽은 도윤이었다.

서약의 말은 각자의 것으로 했고, 성하가 먼저였다. "나 채성하는, 서도윤이 어느 시간에서 오든, 몇 년을 늦든, 알아보고 문을 열어 줄 것을 서약합니다. 이미 두 번 했으니까 세 번째도 할 수 있음." 웃으라고 한 말인데 도윤은 웃지 못했다. 자기 차례가 오자 그는 자기가 아는 계측의 말로 했다. "나 서도윤은… 확률을 모르는 채로, 오차를 모르는 채로, 남은 시간의 전부를 채성하 옆에 두겠습니다. 측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재지 않아도 참이니까."

머리 위로 별이 두 개 연달아 떨어지는 동안 도윤은 다른 것을 하나 떠올렸다. 마주 보는 두 묘 사이에서 이 사람이 웃으며 만들던 규칙이었다. 그때는 견디는 것밖에 못 했던 그 문장이 오늘 밤에는 지킬 것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는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하가 조금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섯 번째 소원, 지금 말해줄게."

이틀 전 밤의 로비에서도 어제의 고백에서도 나오지 않던 이야기여서 도윤은 숨을 멈췄다.

"여덟 해 전에, 다섯 개는 소리 내서 빌고 여섯 번째는 못 냈어. 부끄러워서. 방금 만난 사람 옆에서 빌기엔 너무 큰 소원이라서." 성하는 종이 반지를 낀 손을 폈다 접었다. "이렇게 빌었어. 이 사람이 언젠가, 나를 찾으러 오게 해주세요."

강물 소리가 한순간 멀어졌다.

"고아잖아, 나. 소원 만드는 건 잘하는데, 만들면서도 알았어. 세상에 나를 찾으러 올 사람은 없다는 거.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만들었어. 그런데…" 도윤을 보는 성하의 눈에 유성이 지나갔다. "찾으러 왔잖아, 당신. 좀 많이 늦고, 좀 많이 멀리서. 소원이 이렇게 무서운 거야. 그러니까 함부로 만들면 안 되는 거였어."

도윤에게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팔 년 전 그 언덕에서 한 여자가 만든 소원 하나가 일 년 전의 부고를 지나, 느린 편지를 지나, 놋쇠 원반과 모래시계를 지나 오늘 밤 이 강변까지 그를 데려왔다. 그는 말 대신 성하를 끌어안았고, 그 어깨 너머로 별이 셋, 넷, 다 타면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기 전에 성하는 수첩을 가방 안에 둔 채 강 쪽을 보고 소리 내어 말했다.

"별들이 아이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응. 오늘부터는 방향이 바뀌었어." 그제야 성하는 뜯긴 자리가 남은 수첩을 꺼내 방금 말한 줄을 적고 덮었다. "쫓아다니면서 빌던 아이가, 이제 빌어지는 쪽이 된 거야."

뜯긴 자리는 수첩 한가운데 얇은 흉터처럼 남았고, 성하는 그 자리를 손끝으로 쓸어 보고 웃었다. "책이 되면 이 페이지는 빈 채로 넣을 거야. 여기 있던 문장은 지금 우리 손가락에 있으니까."

돌아가는 길은 천천히 걸었다. 종이 반지가 구겨질까 봐 둘 다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고, 잡은 손도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이 밤이 무엇의 전야인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전야가 아니라 그냥 밤이기로 했고, 그것이 이 밤의 마지막 규칙이었다. 성하의 폰은 호텔 방에 켜진 채 두고 왔다. 오늘 밤 그 방에서 들릴 것은 창밖의 강 소리뿐이었다.

21시 15분, 대상 2인 강변 남단, 이동 없음. 유성우를 보는 수백 명 속에 섞인 두 사람은 망원경 너머에서 여느 연인들과 구분되지 않았다. 다리오는 기록하다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다시 기록으로 돌아왔다.

21시 40분에 내려온 지시는 짧고 이례적이었다. 오늘 밤, 가게를 연다. 조용히. 확인만. 대상들이 강변에 있는 동안, 각인이 끝나기 전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본다는 것이었다.

다리오는 수신 확인을 보내고 나서 잠깐 연필을 쥔 채 앉아 있었다. 서재의 그분은 소란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고 들었다. 조용한 확인과 소란 사이의 거리가 어젯밤보다 가까워 보였지만 그는 그 생각을 어디에도 적지 않았다. 21시 55분, 배치 변경. 그물이 소리 없이 가게 골목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