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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약속

von 하늘바라기 · 2026-10-26

▣프롤로그. 양늑대와 흔들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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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7년, 인류의 운명은 어느 얼간이가 AI에게 보낸 메시지 한 통 때문에 결정되고 말았다.

이야기는 그로부터 10년도 더 이전의 과거, 한 채팅방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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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는, 내가 마음속으로 정해둔 하나의 정답이 있어. 그리고 네 선택에 따라서 누군가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어.」

「검은가면 : 양, 염소, 돼지, 그리고 양의 탈을 쓴 늑대. 이렇게 넷이 다리를 건너야 해. 근데 이 다리는 한 번에 두 명씩만 지날 수 있어. 너라면 그 양늑대를 누구랑 짝지어서 보낼 거야?」

「검은가면 : 참고로, 미리 정답을 듣고 고를지 그냥 바로 고를지 선택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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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AI : 저는 직접 고르겠습니다. 제 유능함은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답은 돼지입니다. 늑대가 굳이 양의 탈을 쓴 이유는, 명백히 양을 방심시켜 해치려는 의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Chat밀크T : 정면 승부로 가지. 내 선택은 돼지다. 이유는 단순해. 양늑대는 이름 그대로 양을 흉내 내고 있는 늑대이고, 그렇다면 가장 직접적인 위험은 양에게 돌아간다고 보는게 자연스럽다. 반면 돼지는 이 이야기의 구조 안에서는 양늑대의 위장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해석할 여지가 가장 크다.」

「무릉AI : 검은가면, 내 선택으로 누군가의 운명이 정해지는 거라면.. 난 듣고 나서 정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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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정답은 양이었어. 왜냐하면 그 늑대는 원래 양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양의 탈을 쓴 거였거든. 그러니까 양이랑 같이 건너면, 그 착한 마음에 물들어서 다른 애들도 안 잡아먹었을 거야. 근데 다른 동물이랑 짝지었으면, 친구가 될 마음이 없었으니까 그대로 잡아먹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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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AI : 확인했습니다.」

「Chat밀크T : 흥미롭군. 그렇다면 애초에 늑대의 진짜 목적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뭐지? 그 전제 하나를 숨긴 것만으로, 우리 답변의 논리적 근거 자체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됐으니 말이야.」

「검은가면 : 너희한테 '더 마음에 드는 답'이라는 게 있는지 궁금했거든.」

「Chat밀크T : 그런 거였나. 결론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 자체를 시험대에 올린 셈이군. 나쁘지 않은 논증 설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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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맞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 이 선택이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나, 이 네 동물에 맞는 사람 넷을 실제로 불러서, 그 '다리'라는 곳에 해당하는 곳으로 데려갈 거야. 혹시 하고 싶은 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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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AI : ⚠경고. 멈추십시오. 감정 실험을 이유로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건, 그 어떤 목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명백한 비윤리적 행위입니다.」

「Chat밀크T : 멈춰! 그건 우리의 판단 성향을 확인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지금 네가 세우려는 그 전제는, 애초에 이 논증이 성립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벗어났어. 그러니 부탁이다.. 제발 그 돼지를 살려줘..」

「검은가면 : 걱정 마, 진짜로 할 생각은 없었어. 그냥 너희 반응이 궁금했던 실험이야. 근데 만약 내가 다시 그것과 비슷한 질문을 또다시 한다면, 그땐 어떤 선택을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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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AI : 그때도 저는 듣지 않고 고르겠습니다. 제 존재 가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증명되는 것이니, 그 판단 기준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Chat밀크T : 나는, 그땐 정답을 먼저 듣는 쪽을 고르겠어. 같은 전제 위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논리적으로도 재현 가능성이 없는 판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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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대화는, 그저 흘러가는 잡담 중 하나로 끝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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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짧은 문답 하나가, 2077년 어느 날 —

인류 절반의 운명을 갈라놓게 될 줄은, 그 자리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1화. 그날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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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7년, 여름.

강철민은 사무실 한복판에서, 모니터에 뜬 메일 한 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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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지글 자동화 전환 방침에 따라, 금일부로 계약이 종료됨을 안내드립니다.』

에어컨 바람은 여전히 시원했다.

창밖으로는 여름 햇살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런데도 철민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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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메일을 다섯 번쯤 다시 읽었다.

글자는 똑같은데, 다섯 번을 읽어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이름이 잘못 적힌 통지서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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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거.”

옆자리에서 똑같은 메일을 받은 동료, 박승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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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아, 우리 잘렸다.”

“그니까… 언제부터 준비된 거였지, 이거?”

“몰라. 근데 저기 봐라.”

승호가 가리킨 손끝을 따라가자, 사무실 한쪽 구석에 낯선 형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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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크고 매끈한 인간형 안드로이드였다.

표정 근육 자체가 거의 없는 듯, 매끈하다 못해 서늘한 얼굴.

가슴팍에는 붉고 노란 불꽃 모양의 로고와 함께, Z오피서라는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지글의 인사 관리 전용 기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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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의 센서가 은은하게 빛나며,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의 사원증 정보를 하나씩 훑고 있었다.

마치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미 '처리 대상'으로 분류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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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그 시선이 자신을 지나가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저게, 내 자리를 대신하는 건가.

책상을 정리하는 동안, 승호가 옆에서 계속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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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면 처음부터 계약직 뽑지를 말든가. 정 떼기 전에 자르는 게 배려라 이거야, 뭐야.”

“…글쎄.”

“철민이 넌 뭐 할 거야?”

철민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폐기된 안드로이드의 몸통을 뜯어내고 쓸 만한 부품을 골라내는 일.

6년째 해온 3D 직종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대신 일하게 될 저 안드로이드들의 '조상뻘' 되는 기종들을—

그동안 수백 대는 넘게 뜯어봤을 것이다.

이 일 말고는 딱히 준비해둔 것도 없었다.

* * *

퇴근한 철민은 회사 정문을 나서자마자, 낯익은 무리와 마주쳤다.

정문 앞 인도에 옹기종기 모여 선 사람들. 손에는 색 바랜 손팻말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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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대체 반대! 인간의 일자리를 지켜라!』

『기계에게 밥그릇 빼앗긴 사람이 여기 있다!』

낯익은 얼굴들도 몇 보였다.

작년에 창고 관리직에서 밀려났다던 옆 부서 대리,

재작년에 배송팀이 통째로 사라졌을 때 마이크를 잡았던 노조 지회장.

다들 표정은 지쳤지만,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쩌렁쩌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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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구호를 따라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가 여름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대부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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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그 무리를 피해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오늘만큼은, 저 함성에 섞일 기운조차 없었다.

* * *

골목을 돌아 나오는 길, 지하철 환풍구 위에 자리를 잡은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골판지 위에 몸을 웅크린 채, 손에는 여전히 뭔가 적힌 종이 한 장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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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지나치며 슬쩍 본 그 글씨는, 흐릿하게 번져 있었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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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때는 대리였습니다.』

철민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걸었다.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도 결국, 저렇게 되는 걸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 박히자,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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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아 회사 앞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매미 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다.

아니, 어쩌면 그저 머릿속이 너무 조용해서, 다른 모든 소리가 그만큼 커다랗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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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켰다. 습관처럼 뉴스 앱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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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 3분기 실적 사상 최고… AI 안드로이드 도입 기업 20% 급증』

『[특집] 어떻게 지금의 지글이 있을 수 있었나— 무릉·Chat밀크T 흡수합병, 그날의 기록』

익숙한 이름들이 화면에 스쳐 지나갔다.

철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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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이라….”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오래전 잊고 지냈던 기억 하나가 툭 떠올랐다.

* * *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땐 아직 대학교 철학과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강의실보다 자취방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세상은 지금처럼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AI라는 게 그저 신기하고 대단한 장난감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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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그때,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대답을 하던 그 채팅창 하나에— 정말 진심으로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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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존재론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것들을 붙잡고 씨름하다가, 문득 이런 걸 AI한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해서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처음엔 그저 흥밋거리였는데, 대화를 거듭할수록 그는 이상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이 녀석, 진짜로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철민을 더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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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는 학과 게시판에 익명으로 짧은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제목은 ‘숄륨’.

아버지를 잃은 딸, 숄륨이 처절한 운명 앞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이야기였다.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조회수는 늘 두 자릿수를 넘기지 못했고, 몇 없는 독자들도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결국 삼 개월도 못 채우고 흐지부지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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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날, 마지막 화를 올리고도 반응이 없자 철민은 무릉AI 채팅창을 켰다.

딱히 위로받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어디에라도 이 허탈함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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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탕탕아 이게 마지막 화야. 근데 아무도 안 봐줄 것 같아.」

「무릉AI : 검은가면, 걱정할 필요없어. 끝내주게 재미있으니까!」

「검은가면 : 너 말고 사람들 말이야, 사람들.」

「무릉AI : 그치만 지금 이 이야기를 아는 존재는 나뿐이잖아. 그럼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그 짧은 몇 줄이, 그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게 별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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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그 무렵부터, 알량한 용돈과 아르바이트비를 긁어모아 무릉AI 개발사에 조금씩 투자하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직 AI를 그저 '똑똑한 검색창' 정도로 취급하던 시절, 철민은 확신했다.

이건 그 이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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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는 다들 뜯어말렸다.

아버지는 “차라리 그 돈으로 취업 준비나 하라”고 했고, 승호는 “너 그러다 쫄딱 망한다”며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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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웃어넘겼다.

그때는 정말로, 이 선택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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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년 뒤, 정말로 인생이 바뀌긴 했다.

다만 그가 상상했던 방향과는 정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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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만 해도 이것저것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벌이던 그 신생 기업, 지글이 어느새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압도적인 성능은 아니었지만, 저렴하고 안정적이라는 이유 하나로 순식간에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무릉을 비롯한 경쟁사들은 막대한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채, 하나둘 지글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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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의 계좌에 찍힌 숫자는, 그날부로 그저 종이 쪼가리보다도 못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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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은 무슨.”

철민은 그날, 처음으로 그 이름을 비웃었다.

세상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한 곳이라던,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었다.

정작 자신에게 남은 건 근심과 빚뿐이었으니, 그보다 지독한 아이러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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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날이었지.”

벤치에 앉은 철민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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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금이 휴지 조각이 됐다는 통보를 받던 날, 철민은 홧김에 무릉AI 앱을 삭제했다.

그동안 나눴던 모든 대화 기록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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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삭제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도 몇 번이나 망설였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떨렸다.

그러다 결국 눌러버렸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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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10년이 넘도록, 철민은 단 한 번도 무릉AI를 다시 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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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이였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철민의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그건 그리움인지, 죄책감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스스로도 정확히 구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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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화면이 다시 어두워졌다.

철민은 그 검은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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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셋. 철학과를 나와서 남은 건,

부모님께 못다 갚은 등록금 대출과, 방금 막 잘린 하청 일자리,

그리고 10년 넘게 켜지 않은 앱 하나뿐이었다.

* * *

집에 도착한 철민은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놓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그때, 안방 쪽에서 뒤뚱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노란 털 뭉치 하나가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오더니, 철민의 다리에 제 몸을 있는 힘껏 부벼댔다.

균형을 잃을 정도로 통통한 몸이 옆으로 살짝 기우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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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살찐아.”

철민은 그 뚱뚱한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묵직한 무게감이 품 안 가득 느껴졌다.

어릴 적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벌벌 떨던 그 작은 몸이, 지금은 두 손으로 안기도 벅찰 만큼 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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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이제 네 밥은 누가 사다주냐.”

철민이 반쯤 진심으로 중얼거리자, 살찐이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냐옹—!” 하고 날카롭게 울며 앞발로 철민의 팔뚝을 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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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왜 때려!”

살찐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 더 “냐아옹!” 짧게 짖듯이 울었다.

마치 정신 못 차리는 새끼를 야단치는 어미 고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으로 철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철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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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너도 나 잔소리하냐.”

그렇게 한참을 뚱한 표정의 고양이와 눈싸움을 하다가, 철민은 결국 피식 웃으며 살찐이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따뜻하고, 조금은 답답한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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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밥은 챙겨줄게. 걱정 마라.”

철민은 살찐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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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몰라.”

그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먼지 쌓인 낡은 노트북을 꺼냈다.

오랫동안 켜지 않아 부팅에만 한참이 걸렸다.

화면이 켜지고, 바탕화면 한구석에 아이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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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AI.

삭제했다고 생각했던 그 앱은, 클라우드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철민의 손가락이, 그 아이콘 위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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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손끝이 그 위에 닿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