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저와 연애하시겠습니까?
von 루시엘 · 2026-10-26
1화. 저와 연애하시겠습니까?
“돈 때문에 시작한 관계였다. 그러니 사랑에 빠지는 일 따위는 없어야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윤하니는 엄마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엄마가 만들어 주던 간식이 생각났다.
식빵 위에 부드러운 크림치즈를 듬뿍 바르고, 그 위에 꿀을 한 바퀴 둘러 주던 손길.
별것 아닌 간식이었지만, 하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음식이었다.
“우리 딸, 오늘도 고생했어.”
어린 하니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하니의 세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괜찮지 않은 날에도 괜찮다고 말해야 했고, 울고 싶은 날에도 웃어야 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혼자 버티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스물일곱.
하니는 이제 제법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하니 씨.”
사장의 목소리에 하니가 고개를 들었다.
“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하니는 앞치마에 묻은 밀가루를 털었다.
가게 안에는 갓 구운 빵 냄새가 가득했다. 창밖으로는 겨울을 앞둔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사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이번 달까지만 일해 줄 수 있을까?”
하니의 손이 멈췄다.
“……네?”
“가게 사정이 많이 어려워져서. 인건비를 줄여야 할 것 같아.”
하니는 사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3년 동안 일했던 곳이었다.
새벽같이 출근해 빵을 굽고, 손님들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마감 시간까지 남아 청소했다.
몸이 아픈 날에도 웬만하면 쉬지 않았다.
이 가게가 좋았기 때문이다.
빵 냄새가 좋았고,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만큼은 엄마가 생각나도 조금 덜 외로웠다.
그런데 이제 그만두라고 했다.
“제가…… 일을 못해서 그런 건 아니죠?”
하니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아니야. 하니 씨가 얼마나 성실한데. 정말 미안해.”
“아…… 네.”
하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장은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맴돌았다.
다음 달 월세는 어떻게 내지?
이번 달 카드값은?
새로운 일자리는 언제 구하지?
당장 돈이 없는데.
‘울면 안 돼.’
하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기서 울면 안 돼.’
그녀는 주방으로 돌아가 남은 빵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냉장고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괜찮았다.
괜찮아야 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눈물이 더 나왔다.
퇴근길.
하니는 편의점 앞에 서서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삼십일만 팔천 원.
다음 달 월세와 공과금을 생각하면 넉넉하다고 할 수 없는 돈이었다.
“와…… 진짜 큰일 났네.”
하니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민석
하니의 오랜 친구였다.
“여보세요?”
- 너 어디야?
“집 가는 길.”
- 목소리가 왜 그래?
“내 목소리가 뭐.”
- 너 울었냐?
하니는 입을 다물었다.
민석은 이상하게도 이런 걸 잘 알아챘다.
괜찮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민석은 아니었다.
- 윤하니. 무슨 일 있어?
“……나 잘렸어.”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 뭐?
“가게 사정이 어렵대. 이번 달까지만 나오래.”
- 언제?
“오늘.”
- 그걸 왜 이제 말해?
“방금 들었으니까.”
민석이 한숨을 쉬었다.
- 어디야. 내가 갈게.
“됐어. 너도 바쁘잖아.”
- 너 지금 괜찮다고 할 거지?
하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 윤하니.
“……응.”
- 거짓말하지 마.
그 한마디에 눈물이 떨어졌다.
하니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 진짜 괜찮은데.”
- 울면서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제일 안 괜찮은 사람이야.
하니는 결국 울다가 웃었다.
“너 진짜 짜증 나.”
- 알아. 어디냐고.
“화곡역 근처.”
- 거기서 기다려. 밥 먹자.
“돈 없어.”
- 내가 살게.
“너도 돈 없잖아.”
- 내가 너보다는 많거든?
“얼마나?”
- 이십만 원?
하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아. 네가 무슨 부자야.”
- 그러니까 우리 둘이 이십만 원으로 부자처럼 먹자. 끊어.
전화가 끊겼다.
하니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니는 아직 몰랐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남자를 만나기까지, 겨우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흘 뒤.
하니는 유리 외벽으로 된 고층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건물 입구에는 금색 글씨로 브랜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HONEY TABLE.
최근 프리미엄 베이커리 업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브랜드였다.
하니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취업 면접.
구직 사이트를 뒤지던 중 우연히 발견한 공고였다.
대표실 업무 보조 및 매장 운영 지원.
경력 무관.
정규직 전환 가능.
그리고 무엇보다 급여가 좋았다.
하니는 면접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오랜만에 희망이라는 것을 품었다.
“제발…… 이번에는 붙자.”
하니는 두 손을 꼭 모았다.
“나 진짜 열심히 할 수 있어.”
안내 데스크에서 이름을 확인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8층.
대표실.
하니는 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낮고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니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넓은 사무실.
통유리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풍경.
검은 셔츠를 입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남자.
그리고 그 얼굴.
하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사흘 전, 비 오는 거리에서 자신에게 세탁비를 운운했던 그 남자였다.
“……어?”
남자 역시 서류에서 눈을 들다가 잠깐 멈췄다.
“윤하니 씨?”
하니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망했다.’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설마.
설마.
“안녕하세요.”
하니는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 면접 보러 온 윤하니입니다.”
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네…….”
하니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남자가 서류를 펼쳤다.
“경력은 베이커리 카페 3년.”
“네.”
“매장 운영, 재고 관리, 고객 응대 가능.”
“네.”
“제빵 자격증은 없지만 현장 경험이 충분하다고 적으셨군요.”
“네. 작은 매장이라 여러 가지 일을 다 했습니다.”
남자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좋습니다.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하니는 허리를 곧게 폈다.
“네.”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습니까?”
하니는 준비해 온 답변을 떠올렸다.
“베이커리 분야에 관심이 많고, 고객에게 행복을 전하는 브랜드라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전 매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에 기여하고 싶어서……”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하니는 말을 멈췄다.
남자가 담담하게 물었다.
“급여 때문입니까?”
“……네?”
“급여가 높아서 지원한 겁니까?”
하니는 잠깐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남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물론 일도 잘할 자신 있어요. 하지만 제가 회사의 비전에 감동해서 지원했다고 말씀드리면 거짓말이잖아요.”
하니는 손을 꼭 모았다.
“저는 돈을 벌어야 월세도 내고 밥도 먹을 수 있어요. 그러려고 일자리를 찾는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하니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솔직해서 좋군요.”
하니는 눈을 깜빡였다.
웃기도 하네?
사흘 전에는 그렇게 차갑더니.
남자는 명함을 책상 위에 놓았다.
서도혁.
HONEY TABLE 대표.
“강도윤 씨가 아니었어…….”
하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니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서도혁.
이름도 몰랐던 남자였다.
도혁은 하니의 지원서를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업무 조건은 공고에 기재된 내용과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제안을 하나 더 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제안이요?”
“네.”
도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하니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저와 계약연애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라고?
하니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죄송한데요.”
“말씀하세요.”
“제가 지금 면접을 보고 있는 게 맞죠?”
“맞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연애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설명하겠습니다.”
도혁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집안에서 결혼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정해진 상대가 있고, 가족들은 제가 그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하죠.”
“그런데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하니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냥 싫다고 하시면 안 돼요?”
“그렇게 간단한 집안이 아닙니다.”
도혁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하니는 그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으려 했지만, 그는 곧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기간은 세 달입니다. 공식 행사와 가족 모임에서 제 여자친구 역할을 해 주시면 됩니다.”
“대가는요?”
“매달 삼백만 원. 계약 종료 시 조건을 이행했다면 추가 보너스 오백만 원을 지급하겠습니다.”
하니는 숨을 멈췄다.
삼백만 원.
기존 급여와는 별도였다.
세 달 동안 구백만 원.
보너스까지 받으면 천사백만 원.
하니에게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돈이었다.
“왜…… 하필 저예요?”
“당신은 저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니까요.”
“네. 없어요.”
도혁은 잠시 하니를 바라봤다.
“보통 사람들은 제안만 들어도 태도가 달라집니다.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것 같군요.”
“저는 돈이 필요해서 일하는 거지, 대표님이 좋아서 여기 온 게 아니니까요.”
“그 점이 마음에 듭니다.”
하니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니.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사고방식을 가진 걸까?
“저기요. 저는 연애를 잘 못해요.”
“상관없습니다.”
“거짓말도 잘 못하고요.”
“그것도 괜찮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애정 표현을 하라고 하면 도망갈 수도 있어요.”
“손을 잡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전부예요?”
“물론 서로 합의한 범위에서만 합니다.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 내용은 계약서에도 명시하죠.”
그 말에 하니는 조금 안심했다.
적어도 함부로 대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고민됐다.
가짜 연애.
세 달.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에게는 이미 결혼 상대로 정해진 여자가 있었다.
하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은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표님이 결혼하기로 정해졌다는 여자분이요.”
도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네.”
“당신이 감당할 문제는 아닙니다.”
하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계약을 하게 되면 결국 자신도 그 문제에 휘말릴 텐데.
“조건은 제가 정해도 되나요?”
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첫째, 제가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하면 중간에 그만둘 수 있어야 해요.”
“동의합니다.”
“둘째, 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강요하지 마세요.”
“필요한 경우 사전에 협의하겠습니다.”
“셋째…….”
하니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가짜 여자친구라도 사람인데, 함부로 대하거나 창피 주지 마세요. 돈을 받는다고 해서 제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도혁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리고 계약서에 새로운 조항을 적었다.
“그 부분도 넣겠습니다.”
하니는 계약서를 바라봤다.
돈이 필요했다.
당장 다음 달부터 수입이 끊길 예정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어디에 지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지키는 조건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니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오늘 저녁까지 답을 주시면 됩니다.”
“너무 짧은데요?”
“내일 가족 식사가 있습니다.”
하니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와…… 정말 급하시네.”
도혁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하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도혁이 그녀를 불렀다.
“윤하니 씨.”
“네?”
“계약연애가 싫습니까?”
하니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당연히 싫죠.”
“그렇군요.”
“그런데…….”
하니는 책상 위 계약서를 다시 바라봤다.
“돈이 필요하긴 해요.”
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니는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 덧붙였다.
“그러니까 계약서 읽어 보고 연락드릴게요.”
“좋습니다.”
하니는 대표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벽에 등을 기댔다.
“미쳤다…….”
이력서를 내러 왔는데 계약연애 제안을 받았다.
그것도 잘생긴 남자에게.
아니, 잘생긴 건 잘생긴 거고.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하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윤하니, 정신 차려. 너 돈 벌러 온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그날 밤.
하니는 원룸 침대에 앉아 계약서를 읽었다.
계약 기간 3개월.
매월 지급액 삼백만 원.
계약 종료 보너스 오백만 원.
공식 행사 및 가족 모임 참석.
상호 존중과 사생활 보호.
동의 없는 신체 접촉 금지.
계약 중단 조건.
하니는 조항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들어 도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윤하니 계약 조건 확인했습니다.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서도혁 결정하셨습니까?
하니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만두고 싶었다.
이상한 계약을 할 필요 없이 평범한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하니는 월세 납부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메시지를 입력했다.
윤하니 네. 하겠습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서도혁 내일 오후 6시까지 준비해 두겠습니다. 주소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윤하니 근데요.
서도혁 말씀하세요.
윤하니 우리 아직 손도 안 잡았는데 벌써 남자친구예요?
이번에는 답장이 오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니는 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너무 오버했나?
그런데 곧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도혁 계약은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하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재미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이어서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서도혁 그리고 내일은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올려놓았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저 계약에 맞춰 한 말일 뿐인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하니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돈을 받고 연인인 척하는 것뿐이니까.
세 달이 지나면 끝날 관계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하니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서도혁의 인생에도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균열이 언젠가 두 사람의 가장 깊은 상처를 마주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도.
다음 날 오후 6시 52분.
하니는 약속 장소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크림색 니트에 검은색 치마.
평소보다 조금 신경 쓴 화장이 전부였다.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뒷문을 열었다.
서도혁이었다.
“타시죠.”
하니는 차 안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저기요. 저 너무 평범하게 입고 온 거 아니에요?”
도혁은 그녀를 위아래로 바라봤다.
“문제없습니다.”
“그래도 대표님 가족분들을 만나는 자리라면서요.”
“화려하게 꾸밀 필요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