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末路)
von 한용운 · 2026-03-20
"아우님, 계신가요?"
봉림은 문간에서부터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언니, 웬일이에요?"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바느질을 하고 있던 순영은 놀라서 일어나 봉림을 맞았다.
"언제나 바느질이죠. 바느질하다가 아우님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순영은 웃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늘 놀러 오고 싶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올 시간이 없어요. 먹고 사는 게 다 무엇인지."
"맞아요. 나도 혼자 살림을 꾸려야 해서 나갈 틈이 없는데, 언니는 더 그렇죠. 어서 앉으세요."
순영은 손으로 마룻바닥을 쓸더니,
"방으로 들어갈까요?"
하고 봉림을 바라보았다.
"방에는 뭐가 있어요? 여기 마루가 따뜻하고 좋잖아요."
봉림은 치맛자락을 덮어치고 앉으려 했다.
"날이 따뜻하니까 오히려 마루가 더 좋죠. 방은 구린내가 나요."
순영은 손으로 쓴 자리를 다시 입으로 불더니,
"방석이 있나 돗자리가 있나, 그대로 앉으세요. 매일 걸레질을 하니까 그렇게 더럽지는 않아요."
하고 바느질하던 것을 치워 놓았다.
"신색은 그전보다 나아졌어요."
봉림은 앉으면서 순영을 바라보았다.
"나아졌다니, 나아질 수가 있나요?"
"아니에요, 나아졌어요."
"모르겠어요, 나아졌는지 어쨌는지, 나는 거울도 안 보니까."
순영은 앞머리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거울을 안 보니까 예뻐지는 건가 봐요. 거울을 보고 화장을 하면 왜 점점 미워지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이제 거울도 보지 말고 화장도 하지 말아야 할까 봐요, 좀 예뻐지게."
"언니는 본래 예쁘니까 화장을 하면 오히려 덜 예뻐질지도 몰라요. 언니 같은 인물은 드물 거예요."
순영은 눈으로 웃었다.
"에구, 이런, 한참 못 봤더니 말재주가 늘었네요. 언니를 놀려 먹으면 죄가 된다나. 그런데 참, 어떻게 지내요?"
봉림은 웃다가 얼굴빛을 바꾸었다.
"어떻게 지내냐고요? 그럭저럭 지내죠, 죽지 않으니까 살고 있어요."
"아니,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은 다 안 정이 되었겠죠. 애절한 마음도 있었을 테고."
"그전보다는 많이 잊어버린 셈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아요."
"처음에 이혼하고 수복이 죽고 나서는 애절했는데, 벌써 삼 년이 지났나요?"
"햇수로는 사 년이에요."
"아우님이 울고 야단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 년이 되었군요. 세월은 참 무정한 것이죠. 그렇죠? 사 년이 아니라 백 년이 지나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어요."
"완전히 잊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자꾸만 생각이 나요.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거죠, 언니?"
"약한 게 아니라, 마음이 인자해서 그런 거예요. 모자간 은정이라는 게 그런 것이거든."
"아니에요, 수복이 생각도 생각이지만, 그건 죽은 것이니 어쩔 수 없고, 그 사람 생각이 자꾸 나요."
순영은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듯이 의심하는 눈으로 봉림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 수복이 아버지 생각이 난다고요?"
"그래요, 언니."
"나는 수복이 생각을 그렇게 한다고? 그 사람을 생각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봉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어떻게 그 사람을 생각하는 거예요? 날 마다 버리고 간 사람을..."
봉림은 조소하듯이 말했다.
"싫어서 버리고 간 것은 아니에요."
"싫어서 버리고 간 것이 아니면 좋아서 두고 간 것인가? 그런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다른 여자와 살기 위해 민적까지 갈라서 간 거라면 그만이지. 그걸 생각해서 무얼 하겠어요? 아니, 나중에 와서 다시 산다는 말을 곧이 듣는 거예요?"
"꼭 곧이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꾸 잊혀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도대체 사 년 동안 몇 번이나 왔었나요?"
"한 번도 안 왔어요."
"그럼, 그 풍파를 일으켜 수복이까지 죽게 만들어 놓고 한 번도 안 왔다고요?"
"금광 하느라고 바빠서 올 새가 없었어요."
"그럼 편지 왕래는 있었나요?"
"편지도 없었어요. 편지를 하려면 주소를 알아야 하잖아요."
"이런 부처님 반 토막 보았나, 아우님이 편지를 했느냐 말이 아니라, 저편에서 편지 한 번도 안 했더냐는 말이에요."
"글쎄, 없었어요."
"그래, 그럼 수복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군요?"
"모르겠어요, 알 수가 없죠."
"이를테면 수복이도 제 아버지가 죽인 것이 아닌가요?"
"그거야 제 명이 짧아서 죽었지, 그랬다고 죽었겠어요."
"제 명이 짧아서 죽다니? 제 아버지가 술을 먹고 들어와서 야단을 치니까 놀라서 경풍이 되어 죽은 것이지, 그랬다고 죽었겠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예요?"
"그래도 제 명이고, 저래도 제 명이지, 어쩌겠어요."
순영은 눈물을 씻었다.
"그래, 그러고 가서 사 년이 되도록 한 번도 오지도 않고, 편지 한 장도 없는 그 사람을 믿고 기다린다고요?"
봉림은 눈물을 흘리고 앉은 순영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너무도 속이 없는 것 같아서 멸시하는 듯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아무리 해도 그 사람이 거짓말로 나를 속일 것 같지는 않아요. 그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그이는 나를 살려 준 은인이기도 하고, 또 어쩐지 자꾸만 생각이 나요. 그게 사람이 못나고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거죠, 언니? 언니 같으면 그런 사람은 생각도 않겠죠?"
순영은 자기가 대체를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허물이 되는 듯이 말했다.
"나 같으면 생각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자가 와서 비지 발하고 한 번 보자고 해도 보지도 않을 거예요. 편지가 오면 포지도 않고 불에 넣어 버릴 거예요. 그런 것을 사람이 라고, 생각이 다 뭐예요?"
봉림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렇죠, 언니 성미 같으면 그렇고 말고,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한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이가 자꾸 불쌍하기만 해요. 그리고 그이가 자꾸 믿어지고 사람이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 싶거든요. 지금이라도 돈만 있고 그이가 있는 곳을 알면 돈을 보내주고 싶어요. 어째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이뿐 아니라 누구든지 사람이 그렇게 잘못하랴 싶고, 또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고 그래요. 그게 사람이 못나서 그런 거죠, 언니?"
순영은 길 잃은 사람이 길을 묻듯이 진정으로 자기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스스로 비판하지 못해 묻는다.
"못나기야 왜 못나, 그게 좋은 마음이고 착한 생각이지. 남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여간 좋은 생각인가? 하지만 믿어서 소용이 없는 사람을 믿기만 하는 것은 도리어 어리석은 일이거든, 하니까 말이지 못나기야 왜 못나?" 봉림은 순영의 말에 느낀 바가 있는 듯이 태도를 고치더니,
"그런데 참,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딴소리만 하고 있었네요."
하고 순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에요? 이제 그런 말은 고만두고 다른 말이나 해요."
순영은 봉림이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새로운 기대를 가졌다. "그런데 그런 일도 있을까?"
봉림은 순영의 편으로 다가 앉았다.
"무슨 일?"
"사람이 그렇게 되는 수는 없겠죠?"
"무슨 말이에요?"
순영은 더욱 듣고 싶어했다.
"내가 아마 잘못 보았나 봐."
"아, 글세 무슨 말이야?"
"사람의 일이 밤새 문안이라고 하지만, 사 년 동안에 아무렇기로 그렇게 될 리가 있겠어요."
"아이 참 언니도, 말은 아니고 사람의 간장만 녹이려 드네." 순영은 논을 흘리는 듯이 웃었다.
"하도 이상해서 내가 잘못 보았나 어쨌나, 말하기가 어려워서 이러고 있어요, 글세."
"아이, 하늘에 별이나 따는 소리가 나올라나 봐요. 이렇게 허두가 긴 것을 보니."
순영은 도리어 긴장한 빛을 잃은 듯했다.
"그런데 사람이 사 년 동안에 부자가 거지도 되고, 거지가 부자도 되고 그러는 수가 있겠죠, 아우님?"
"사 년은 그만두고 일 년 동안이라도 그렇게 될 수가 있겠죠."
"그건 그래요. 그래도 하도 이상하고 의심나서 말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기왕 말을 내었으니 본 대로 말을 하지. 하지만 아무리 해도 내가 잘못 보았을 거예요. 잘못 보는 수도 있고, 또 같은 사람도 많이 있거든."
봉림은 눈을 순영의 눈과 마주쳤다 돌렸다 몇 번을 하더니,
"아우님, 저 해태 앞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사직공원 쪽으로 가는 길이 없나요?"
"내 자동 쪽으로 가는 길 말인가요?"
"그래요, 그 길 말이에요."
"그래, 그런데?"
"그 길로 들어서려면 첫머리에 양옥집처럼 지은 집이 있지 않나요?"
"그런 집이 있던가, 아마 있나 봐요."
"그래, 그런 집이 있는데, 그 집이 바로 아편장들에게 아편을 파는 집이거든."
"아편을 팔아? 아편은 팔면 잡아간다는데."
"그런데 이것은 가만히 파는 데가 아니라 인가를 맡아 가지고 파는 데래요. 그리고 거기 가서 아편을 사는 데도 인가를 맡아야 한다나. 하여간 그 속내는 자세히 몰라도 아편을 파는 데라니까."
"모르지, 나는 멍텅구리라 그런 것을 아나."
"그런데 내가 큰동서네 집에 다니느라고 그 길로 차주 다니거든."
"그런데, 다니는데?"
"그런데, 언젠가 저번에 비가 오던 날이야. 그 집 앞을 지나는데 말이야."
"에구, 대답하기도 귀찮아, 어서 말을 해요."
순영은 웃으면서 화를 내는 체했다.
"아무리 해도 내가 잘못 보았나 봐."
"에구, 그만 두어, 듣기 싫어. 나는 듣지도 않을 테야."
순영은 기지개를 켜면서 뒤로 드러눕는 자세를 취했다.
"아니야, 이것은 내게는 손톱만큼도 상관없는 말이야. 아우님에게 관계가 있는 말이지, 관계라도 여간 큰 관계가 아니거든."
봉림은 말을 하지 않아도 관계가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뒤로 짚고 버둥하게 앉았다.
"무슨 말이기에 내게 큰 관계가 있어, 어서 말을 해요."
순영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우리 같으면 들어야 고만, 안 들어야 고만이지만, 아우님은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