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2
von 한용운 · 2026-08-25
그 여자는 물을 또 마시더니 옆으로 대철을 힐끗 보고 말을 이었다.
“에구, 그래서 나는 당신의 행복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었어요.”
“우선 당신의 남편을 뺏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모르는 체했어요.”
“당신을 아는 체하거나 원산에서 당신을 건져 낸 일을 아는 체하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캐물어 사정을 다 알아냈지요.”
“그리고 저이를 꾀기 시작했어요.”
“꾀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요. 제가 먼저 나에게 미쳐서 죽으려 들었으니까요.”
“그러니 내 소원이 순풍에 돛 단 듯 이루어진 것 아니겠어요.”
“나한테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위인을 달콤하게 구슬렸으니 오죽 잘되었겠어요.”
“그래서 끝내는 당신과 이혼까지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에구…… 숨이 차서 좀 쉬었다 말해야겠어요.”
“주사 기운이 줄어드니 어서 말을 해야 하는데.”
그 여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당신과 이혼을 시켜 놓았으니 나하고 혼인 신고를 해야 할 것 아니겠어요.”
“나는 그때까지 정식으로 혼인해 본 일이 없었거든요.”
“속으로야 화냥년이지만 형식으로는 훌륭한 처녀였지요.”
“그래서 저이하고 호적을 함께 올리지 않았겠어요.”
“기가 막혀요. 처음 사귈 때는 사람이 그럴듯해 보이더니, 딱 호적을 올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허구한 날 술만 마시고, 금광인지 무언지 한답시고 돌아다녀도 금싸라기 하나 구경을 못 했어요.”
“내가 그야말로 몸을 팔아 모아 두었던 돈 천여 원만 요리조리 다 발라먹었지요.”
“나중에는 아편까지 먹기 시작했는데, 나더러도 먹으라고 보여 주기도 하고 달래기도 해서 나도 먹게 되었어요.”
“나도 병이 없었으면 꾐에 넘어가지 않았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여러 해 몸을 함부로 굴리다 몹쓸 병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것에 손을 대고 이 꼴이 되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 더러운 욕심을 채우려고 그런 것이더군요. 누가 알았겠어요.”
“그것을 먹은 뒤 얼마 동안은 한 이불 속에 누우면 밤이 가는지 해가 가는지, 세상이 무너지는지도 몰랐어요.”
“그런 더러운 짓을 하려고 그랬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나 차차 중독이 되고 돈이 떨어지니 어쩌겠어요.”
“그러다 어찌어찌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처음 얼마 동안은 그런대로 지냈지요.”
“하지만 오래갈 수가 있나요. 그래서 갈라져 다니다가 서로 이 꼴이 된 것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여기 와 있었어요. 이 위 골짜기에서 늘 지냈지요.”
“그러니 당신은 나를 몰랐어도 나는 당신을 알았지요. 저이가 있는 것도 알았고요.”
“그러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지금까지 있었지만, 속으로야 어찌 아무렇지 않았겠어요.”
“언제든 당신에게 이런 사죄나 하리라 생각하고 있다가, 이제 죽게 되니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것이에요.”
“아무튼 당신은 착하고 어진 사람입니다.”
“저 위인을 끌고 다니느라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당신은 이승에서는 나 때문에 고생하지만, 다음 생에는 반드시 극락으로 가실 거예요.”
“나는 이따라도 죽으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갑니다.”
“나도 이렇게 고생하다 죽어야 마땅하고, 저이도 저렇게 고생하다 죽어야 마땅하지요.”
“저이도 곧 죽을 겁니다. 저 모양이 되고서 살 수가 있나요.”
“저이가 죽은 뒤에는 아무쪼록 복을 받고 사시다가 극락으로 가세요.”
“이제 더 할 말도 없고, 주사 기운이 다해 말할 수도 없군요.”
“순영 씨, 부디부디 복 받고 오래오래 잘 사세요.”
그 여자는 순영을 보며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그러다 대철을 돌아보았다.
“여보세요, 나는 난향이오. 당신은 난향이라고 해야 알겠지요.”
“나는 당신의 애인이었고 당신의 아내였소.”
“당신은 내가 아니면 못 살겠다고 했지요. 나도 당신이 아니면 못 살겠다고 했고요.”
“그러던 것이 이 꼴이 되었소그려.”
“하여간 죽어도 한자리에서 죽게 되었으니 어지간한 내외의 정분이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죽을 때는 착한 생각이 난다더니, 나도 죽게 되니 후회가 나오.”
“당신도 아마 그러겠지요.”
“하여간 인생으로 태어났다가 피차 불쌍한 일이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작별이오.”
그 여자는 다시 눈물을 흘리고 순영을 보았다.
“부디 안녕히 계세요.”
“우리가 어려서 장난삼아 한 말 한마디가 이만한 일을 빚어냈군요.”
“부디 복 받으세요.”
그러고는 왔던 길로 도로 기어갔다.
순영은 그 여자를 붙들려다 말았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순영은 대철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운옥의 말을 듣는 동안 한숨만 쉬고 있던 대철이 눈물을 흘려 땅을 적시고 있었다.
순영은 운옥에 대해 캐묻지 않고 다만 숨기척만 살폈다.
숨은 점점 가빠지고 이마에는 진땀이 흘렀다.
“왜 그러세요? 마음을 진정하세요.”
순영이 위로하자 대철은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지금 몇 시나 되었소?”
대철이 조금 진정하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물었다.
“어둑어둑해요. 아마 여덟 시쯤 되었을 거예요.”
“주사가 남았소?”
“네, 있어요.”
“아니, 아까 그 여편네에게 주었잖소.”
“그래도 두 대쯤은 남았어요. 선생님 쓰실 것도 없이 남을 줄 리가 있어요?”
“그럼 한 대 맞아 볼까.”
“금방 죽을 놈이 주사는 맞아 무얼 하겠소만, 나도 좀 할 말이 있으니까.”
대철이 턱으로 팔을 가리켰다.
“그러지 마시고 마음을 진정하세요.”
그러면서도 순영은 주사를 놓아 주었다.
“나를 좀 일으켜 주시오. 누워서는 숨이 가빠 말을 할 수가 없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