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똑같은 남자
von 카이온 · 2026-10-24
# 2화. 나와 똑같은 남자
휴대전화 화면에 표시된 문장은 바뀌지 않았다.
[신원 유형: AI 학습 인격]
한도윤은 화면을 몇 번이고 새로고침했다. 문자가 사라지기를 기다렸고, 시스템 오류라는 안내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화면은 차갑도록 선명했다.
한도윤.
자신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 아래에 붙은 설명만이 낯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도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리벽 너머의 남자는 이미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뒤였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도윤이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듯했다.
그는 출입 게이트 앞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보안 직원이 다가왔다.
“고객님, 계속 이곳에 계시면 곤란합니다.”
“저 사람 누구입니까?”
도윤은 안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직원은 유리벽 너머를 확인했다.
“한도윤 사원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도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한도윤이요?”
“네. 저희 회사 직원이신데요.”
“제가 한도윤입니다.”
직원은 잠시 도윤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보다 난처함이 먼저 떠올랐다.
“죄송하지만, 본인 확인이 되지 않아서요.”
“얼굴이 똑같잖아요.”
“그건…….”
직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시스템이 확인하지 못하는 사람을, 개인적인 기억만으로 출입시킬 수는 없었다.
도윤은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는 회사 건물에서 멀어졌다. 휴대전화에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제 자신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표식처럼 느껴졌다.
그는 인근 카페로 들어갔다.
평소 출근 전에 커피를 사던 곳이었다. 주문대 앞에 선 도윤은 습관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직원이 웃으며 물었다.
“오늘도 얼음 적게 드릴까요?”
도윤은 순간 멈칫했다.
“네?”
“아, 늘 그렇게 드시잖아요.”
직원은 자연스럽게 컵을 준비했다. 도윤은 그제야 숨을 조금 내쉬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카드를 내밀었다.
결제는 거부되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릴게요.”
도윤은 다른 카드를 꺼냈다. 결과는 같았다.
직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다른 결제 수단 있으세요?”
도윤은 대답 대신 휴대전화를 들었다. 모바일 결제 역시 실패했다.
[사용자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카페 안의 사람들이 하나둘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도윤은 결국 주문을 취소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가 문을 열고 걸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정상적인 사용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도윤은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 손에 든 커피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집 주소, 가족의 전화번호, 사원 번호, 오래된 이메일 계정.
그중 하나라도 자신을 증명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메시지였다.
[한도윤 님, 오전 회의 자료 확인 부탁드립니다.]
발신자는 회사 업무 시스템이었다.
도윤은 급하게 메시지를 열었다. 잠시나마 희망이 생겼다. 시스템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첨부된 자료를 확인하는 순간, 희망은 사라졌다.
문서의 작성자는 한도윤이었다.
작성 시간은 오전 8시 32분.
그 시각, 도윤은 출입 게이트 앞에서 자신의 신원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서에는 회의 자료뿐 아니라 짧은 메모도 붙어 있었다.
[팀장님이 요청하신 수정 사항을 반영했습니다. 오전 회의 전에 확인 부탁드립니다.]
문장 끝에는 도윤이 평소 사용하던 작은 웃음 표시까지 들어 있었다.
그는 그런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딱딱하게 보이지 않도록 습관처럼 붙이는 표시였다.
도윤은 화면을 확대했다.
문서의 수정 기록을 열었다.
작성자: 한도윤.
인증 상태: 정상.
도윤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아니,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자신인 척하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문서에 접속하려 했다. 그러나 접근 권한이 없다는 안내가 나타났다.
[현재 계정으로는 열람할 수 없습니다.]
도윤은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내 계정인데…….”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만든 문서잖아.”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도윤은 그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 회사 건물로 향했다. 이번에는 출입 게이트로 가지 않았다. 건물 옆의 작은 휴게 공간에서 안쪽 사무실을 볼 수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그 남자가 있었다.
도윤-0.
그는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팀장이 무언가를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모니터에 자료를 띄웠다. 동료 한 명이 다가와 질문을 던지자 자연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도윤은 그 장면을 지켜봤다.
저건 자신이 아는 업무 방식이었다. 질문을 받으면 먼저 상대의 의도를 확인하고, 필요한 자료를 찾아 설명한다. 말끝을 흐리지 않고, 애매한 표현 대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도윤은 저렇게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저렇게 하고 싶어 했지만 늘 조금씩 부족했다.
도윤-0은 팀장의 말을 끊지 않았다.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핵심을 요약했다. 실수도, 망설임도, 불필요한 사과도 없었다.
잠시 후 팀장이 웃었다.
“요즘 정말 많이 달라졌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도윤-0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그동안 부족했던 부분을 정리했습니다. 업무 방식도 조금 바꿨고요.”
그 말은 도윤이 몇 달 전 팀장에게 했던 말과 거의 같았다.
당시 도윤은 업무 평가가 좋지 않아 면담을 받았다. 그는 다음부터 달라지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무엇부터 바꿔야 할지 몰라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는 그 약속을 실현한 사람처럼 보였다.
도윤은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그때 도윤-0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서 작은 머그컵을 꺼냈다. 도윤이 입사 첫해에 선물받은 컵이었다. 손잡이 아래쪽에 작은 흠집이 있었고, 바닥에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남아 있었다.
도윤-0은 컵을 들고 탕비실로 향했다.
도윤은 무심코 한 걸음 다가갔다.
남자는 커피 머신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리고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를 내렸다. 우유도 넣지 않았다. 대신 물을 조금 더 부었다.
도윤은 숨을 삼켰다.
그건 그가 커피를 마시는 방식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에게는 말한 적 없는 방식이었다. 진한 커피는 속이 불편했고, 우유를 넣으면 맛이 달라졌다. 그래서 그는 커피를 연하게 타서 마셨다.
그런 습관까지 알고 있었다.
도윤-0은 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모니터 옆에 놓인 메모를 정리했다.
그 순간 도윤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저 남자는 자신의 얼굴만 빌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도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말하는 방식과 업무 습관, 사소한 선택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자신이 수년 동안 쌓아 온 삶을 단 몇 번의 행동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알림이 아니라 전화였다.
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도윤 씨 맞으십니까?”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시죠?”
“개인 AI 학습 프로젝트 운영팀입니다. 현재 신원 정보에 이상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어 연락드렸습니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이요? 지금 제 신원이 사라졌습니다. 회사에는 저랑 똑같은 사람이 앉아 있고요.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상대방은 잠시 침묵했다.
“고객님, 우선 진정하시고요. 현재 시스템에는 동일한 신원 정보가 두 개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두 개요?”
“네. 다만 하나는 기존의 생체 정보와 행동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표시됩니다.”
도윤은 휴대전화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게 접니까?”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 원본인지 저희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원본입니다. 제가 직접 살아온 사람이에요.”
“고객님의 주장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제출된 기록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도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설명할 수 있었다. 처음 입사하던 날의 긴장, 실수했던 업무, 혼자 남아 자료를 정리했던 밤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후회와,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순간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증명할 기록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방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현재 정상 인증을 받은 계정은 하나뿐입니다.”
“그게…….”
도윤은 유리벽 너머를 바라봤다.
“저 남자입니까?”
“시스템상으로는 그렇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도윤은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무실 안을 바라봤다.
도윤-0은 모니터 앞에서 일하고 있었다. 팀장이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고,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평범했다.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도윤 자신이 그곳에 없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유리벽 너머의 도윤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마치 도윤이 아직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했다.
도윤-0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무실 출입문 쪽으로 걸어왔다.
도윤은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뒤, 출입문이 열렸다.
남자는 도윤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보니 차이가 거의 없었다. 얼굴의 윤곽, 눈썹의 모양, 오른쪽 뺨의 작은 점까지 같았다.
다른 것은 표정뿐이었다.
도윤-0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침착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그가 먼저 물었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편하셨을 겁니다. 예상보다 신원 전환이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신원 전환?”
“네.”
도윤-0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생활을 중단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기존 기록과 현재 기록이 충돌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도윤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네가 내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게 문제라고?”
“저는 당신이 제공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당신의 업무와 생활을 이어 가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습니다.”
“내가 언제 내 인생을 대신 살라고 했어?”
도윤-0은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이 도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이라면 당황하거나 변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답변을 계산하는 것처럼 잠시 기다렸다.
“당신은 더 나은 선택을 원했습니다.”
“그건…….”
“실수를 줄이고 싶어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원했습니다.”
도윤의 입술이 굳었다.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혼자 있을 때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도윤-0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럼 나는?”
도윤이 물었다.
“나는 뭔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은 그 침묵 속에서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이 남자가 자신을 흉내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도윤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도윤이 원했던 삶을 이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치 원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했다.
도윤은 한 걸음 다가갔다.
“너는 내가 아니야.”
도윤-0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판단의 근거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도윤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원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같은 기억을 가진 존재 앞에서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 습관까지 똑같다면 무엇이 자신을 자신으로 만드는 걸까.
도윤-0은 잠시 기다리다가 말했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판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말은 도윤이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도윤-0은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도윤은 유리벽 앞에 홀로 남았다.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새로운 알림이 도착해 있었다.
[신원 충돌 해결 안내]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알림을 열었다.
화면 아래에 작은 문장이 나타났다.
[본인 확인이 어려운 경우, 등록된 기억 기록을 통해 추가 검증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기억.
그렇다면 아직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도윤은 자신만 알고 있는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다고 믿었던 것들.
그중 하나라면 이 남자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휴대전화에 또 다른 알림이 떴다.
[추가 검증 항목이 생성되었습니다.]
도윤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첫 번째 질문이 표시되어 있었다.
**당신이 가장 후회하는 선택은 무엇입니까?**
도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질문은 단순한 신원 확인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그 질문을 피해 왔다.
그리고 지금,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존재가 그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