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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돌리기

von 받아적는사람 · 2026-10-22

"3권 중반이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덜 떨렸다. 밤새 준비해 둔 답이었다.

"등불 축제 다음 장에서 멈췄어요. 거기서 더는 못 읽었어요."

"왜?"

"……연재가 끊겨서요."

장교의 말이었다. 뒤에 붙던 욕은 삼켰다.

여자가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다들 꼭 거기서 끊기더라."

"네?"

"3권 중반. 1급 마흔한 명 중에 거길 넘어간 사람이 없어. 신기하지. 제일 재밌어지기 직전에 다들 멈춰." 여자가 장갑 낀 손가락으로 내 등록 서류를 톡 쳤다. "끊는 자리 하나는 기가 막혔지."

말투가 묘했다. 어디서 끊을지 직접 고른 사람처럼 말했다.

"끊는 자리요?"

"질문은 내가 해." 여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도라야. 등록소장."

"이렌 보르입니다."

"알아. 방금 내가 도장 찍으라고 했어." 도라가 돌아섰다. "내일 아침 배정표 나와. 늦지 마. 1급은 하루도 안 쉬게 하거든."

"배정이요?"

"1급은 놀고먹는 줄 알았어? 연금 값은 해야지." 도라가 어깨너머로 말했다. "원작 아는 만큼 일하는 거야. 아는 만큼만."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도라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 * *

등록증은 손바닥만 한 동판이었다. 금색 가시 테두리 안에 내 이름과 「1급」이 새겨져 있었다.

"첫해 연금 선지급입니다."

연금 창구 서기가 금화를 셌다. 한 닢, 두 닢. 쉰 번 소리가 났다. 금화는 은화보다 소리가 낮았다. 처음 알았다.

"쉰 닢 맞는지 세 보세요."

"……쉰이에요."

"전생 이름 칸이 비었네요. 1급인데."

"늦깎이라서요."

"나중에 생각나면 꼭 고치세요. 등급 심사 때 빈칸 있으면 다시 불러요." 서기가 영수증을 내밀었다. "서명하세요."

펜을 쥐었다. 이렌 보르. 10년 동안 남의 말 아래 귀퉁이에만 쓰던 이름이었다.

자루를 두 손으로 안고 나오는데 지하 계단 아래에서 쇠사슬 소리가 올라왔다.

재봉사였다. 경비 둘 사이에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좋은 외투는 벗겨지고 셔츠 바람이었다. 맨 아래 칸에서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내 얼굴을 지나 가슴의 동판에 닿았다. 금색 가시 테두리. 1급.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동판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

"빨리 내려가. 1급 나리 앞에서 고개 들지 말고."

경비가 등을 밀었다. 지하 문이 닫혔다. 나는 금화 자루를 끌어안고 정문으로 나왔다.

* * *

약재상 어르신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보르 아가씨, 월말이라고 하지 않았……."

말이 끊겼다. 그의 시선이 내 가슴의 동판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사이 얼굴색이 두 번 바뀌었다.

"……1급, 이십니까."

"네."

"언제……."

"지난달에 깼어요."

어르신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그의 정수리를 본 적이 없었다.

"그, 그간 결례가 많았습니다. 아가씨가 건너오신 줄도 모르고."

"괜찮아요. 저도 몰랐으니까요."

농담처럼 말했다. 어르신은 웃지 않았다. 웃어도 되는지 몰라서였다.

"밀린 스물넷이랑 이번 달 열둘이요. 그리고 석 달 치 미리요."

"석 달 치나요? 아, 네, 네." 어르신이 장부를 펼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제일 좋은 약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남부에서 들어오는 뿌리약이 있는데, 원래는 건너오신 분들 댁에만 넣는 거라."

"그런 약이 있었어요?"

"……있었습니다."

"붙박이한테는 안 팔았고요."

"규칙이, 그렇다 보니. 아가씨도 아시잖습니까." 어르신이 손을 비볐다. "아니, 이제 아가씨는 그쪽이시니까."

어르신은 내 눈을 보지 못했다. 어제의 이렌과 오늘의 이렌은 같은 사람이었다. 달라진 건 동판 한 장.

그 동판 뒤에 교수대가 붙어 있다는 것도 같이 셌다.

* * *

"언니, 그거 뭐야?"

페트라가 금화 자루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단주님이 퇴직금 주셨어."

"마르코 상단주가? 그 짠돌이가? 작년 겨울 축일에 사과 한 알 준 사람이?"

"응."

"거짓말."

"……진짜야."

페트라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그 눈이 나를 빤히 봤다. 열다섯 살짜리가 그런 눈을 하면 안 된다.

"언니, 거짓말할 때 상단주 목소리 나오는 거 알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도 그랬어. 「응」 할 때 끝을 이렇게 늘였잖아. 상단주처럼."

"……기분 탓이야."

"그리고 언니 옷에서 종이 냄새 나. 잉크 냄새." 페트라가 코를 킁킁거렸다. "상단 창고는 밀 냄새잖아. 오늘 어디 갔어?"

"심부름."

"어디로?"

"……등록소."

"거기 붙박이는 못 들어가잖아. 문에 써 있다던데."

"뒷문으로 갔지. 심부름꾼은 원래 뒷문이야."

이번엔 상단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페트라는 한참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새 약을 달여 주자 페트라가 코를 대 보았다.

"냄새부터 달라. 이거 비싼 거지?"

"퇴직금이 많았어."

페트라는 쓰다고 찡그리면서도 다 마셨다. 기침 없이 잠든 얼굴을 보다가 동판을 외투 안쪽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새 공책을 꺼냈다. 서른두 번째. 처음으로 남의 말이 아닌 걸 적는 공책이었다. 적고 보니 그것도 남의 말이었다.

「건너온 척 규칙.

하나. 원작은 원작이라고 부를 것. 「그 책」은 붙박이 말.

둘. 권수는 3권 중반.

셋. 아는 걸 다 말하지 말 것.

넷. 붙박이에게 먼저 말 걸지 말 것.

다섯. 백작 부인처럼 느리게 말할 것.」

다섯 줄 모두 누군가의 말투를 베낀 규칙이었다. 하나라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았다.

* * *

다음 날 아침, 대회랑에 배정표가 붙었다. 건너온 이들이 그 앞에 모여 있었다.

"나 재무청이야! 2권 회계 장면 나오는 데."

"좋겠다. 난 또 북부 국경 보급대."

"4권 전쟁 대비지 뭐. 거기서 실적 쌓으면 등급 심사 때 유리하대."

"너는 몇 권 인물 밑이야?"

"2권 인물. 재무청 차관. 대사 두 줄 나오는 사람."

나는 그들의 말투를 주워 담았다. 장소도 사람도 권수로 부르는 버릇.

내 이름은 맨 아래 칸에 있었다.

【1급 이렌 보르 / 황태자궁 전담 조언역】

웅성거림이 멎었다. 그리고 다시, 훨씬 크게 일었다.

"황태자?"

"3권에서 죽는 그 황태자?"

"와, 신입한테 폭탄 돌리기네."

"전임 조언역이 셋이었잖아. 셋 다 한 달을 못 버텼다며."

"버틸 이유가 없지. 어차피 3권에서 죽을 사람 옆에 붙어 있어 봤자 뭐 해. 실적도 안 남아."

"근데 3권 어디서 죽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모르지. 1권 프롤로그에 딱 한 줄 나오잖아. 「오라버니가 죽던 그해 겨울, 나는 울지 않았다.」 그게 3권 겨울이라는 것만 알지."

"그러니까 더 폭탄이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황태자궁 조언역은 등록소 회의에서도 맨 끝자리래. 누가 그 자리에 1급을 보내?"

"소장이 보냈겠지. 신입 길들이기."

"아니면 소장이 뭘 보고 싶은 거거나."

누군가 나를 돌아봤다.

"새로 오셨죠? 늦깎이 1급이 왔다던데 그쪽이에요? 혹시 몇 권까지……."

"3권 중반이요."

"아, 그럼 아시겠네. 거기 들어가면 뭐…… 겨울 오기 전에 정리해야지. 길어야 석 달?"

"석 달이요?"

"전임 조언역이 그러던데. 넉 달이라는 사람도 있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1급이면 북문 얘기는 알죠? 그거 언제예요?"

"……등불 축제 지나고 한 달, 보름밤이요."

"역시 1급." 그가 옆 사람을 툭 쳤다. "들었지? 보름밤. 밀 사 둬."

석 달. 그 말을 머릿속 공책에 적었다. 「석 달, 겨울, 프롤로그 한 줄.」 손이 펜을 찾았다. 없었다.

도라가 대회랑 위층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늦지 마.」

* * *

황태자궁은 황궁 북쪽 끝에 있었다. 북문과 가장 가까운 궁.

"1급?" 정문 근위병이 내 동판을 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이번엔 얼마나 버티시려나."

"……오래요."

"앞에 분들도 다 그러셨죠." 근위병이 문을 열었다. "안내해 드려."

안내하는 시종은 붙박이였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소년.

그 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건너온 이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게 하인의 규칙이었다. 10년 동안 나도 그랬다.

"이름이 뭐야?"

소년이 놀라서 돌아봤다.

"……한스입니다."

"고마워, 한스."

"제가 뭘 했는데요?"

"길 알려 줬잖아."

"……시키신 거잖아요."

"그래도. 이름 알려 준 것도 고맙고."

"그건 물으셨으니까요." 한스가 앞장서 걸었다. "다른 분들은 안 물어요."

소년의 얼굴에 경계심이 번졌다. 건너온 이가 하인 이름을 묻는 건 대개 나쁜 일의 시작이었다. 규칙 넷. 첫날부터 어겼다.

황태자궁 복도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다른 궁이었다면 조언역과 서기들로 북적였겠지.

여기에는 하인들만 오갔다. 빨래 바구니를 든 아낙, 장작을 진 화부, 은쟁반을 든 시녀. 그들은 나를 보면 벽에 붙어 섰다. 10년 동안 내가 서던 자리였다.

"조언역님은 서재로 바로 가시면 돼요." 한스가 작게 말했다. "전하는 아침부터 지도만 보세요."

"무슨 지도?"

"북문이요. 요즘은 맨날 북문만 보세요."

긴 복도 끝에서 문이 열렸다.

서재였다. 벽마다 지도가 걸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종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가장 큰 지도는 수도 북쪽이었다. 북문 자리에 붉은 잉크로 동그라미가 여러 번 덧그려져 있었다. 종이가 얇아질 만큼.

창가에 남자가 서 있었다.

스물대여섯. 검은 머리. 황실 사람답지 않게 소매를 걷어 올렸고 손등에 잉크가 묻어 있었다. 그가 돌아봤다.

어디서 본 얼굴 같았다. 아니, 본 적이 없었다. 어제 거울 속 등불 너머, 그림자에 가려 있던 자리가 꼭 이 높이였다.

"네 번째군."

목소리가 낮고 건조했다.

"전하, 이렌 보르입니다. 등록소에서……."

"알아. 1급. 3권 중반." 황태자 카시안이 책상 위 서류 한 장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등록소는 늘 갓 들어온 사람을 보내 주더군. 어차피 오래 쓸 일 없다고."

"……."

"앞의 셋이 첫날 무슨 말부터 했는지 알아?"

"모릅니다."

"원작 얘기. 내가 몇 권에서 뭘 하는지. 인사보다 먼저."

"그럼 저는 인사부터 할게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그래.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나는 무릎을 굽혔다. 손님들 앞에서 하던 것보다 반 뼘 더 깊이.

카시안이 다가와 동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내 눈을 봤다.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당신도 내가 언제 죽는지 알고 왔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