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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기다리는 사람의 실력

von 앙상블 · 2026-10-22

# 퍼펙트큐

## 1부. 무너진 큐

### 13화. 기다리는 사람의 실력

월요일 아침, 민호는 출근하자마자 회의 자료를 확인했다.

새로운 업무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지난주 박준호가 정리한 일정표에는 각 단계의 담당자와 중간 점검 날짜가 표시되어 있었다. 민호는 자료를 검토하다가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외부 업체에서 받아야 할 검토 결과가 늦어질 경우, 다음 단계의 내부 검토 일정까지 연쇄적으로 밀릴 가능성이 있었다.

준호가 만든 일정표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문제가 없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민호는 준호를 불렀다.

“이 부분은 외부 검토가 늦어지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준호는 화면을 확인했다.

“일단 예정된 날짜까지 기다려 보고, 늦어지면 그때 일정을 다시 조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있지. 그런데 결과가 늦어졌다는 걸 며칠 뒤에 알게 되면 우리 쪽 일정도 이미 밀릴 수 있어. 중간에 진행 상황을 확인할 날짜를 정해 놓는 건 어때?”

준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습니다. 제가 업체 쪽에 중간 확인 날짜를 잡아 보겠습니다.”

민호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자신이 알고 있는 위험 요소를 전부 설명하고, 일정표를 직접 고쳐 주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준호가 스스로 방법을 찾도록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필요한 문제를 짚어 주고, 준호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확인하는 것. 그것도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회의에서 팀장은 준호의 일정 관리가 개선되었다고 평가했다. 민호가 지적했던 중간 확인 절차도 반영되어 있었다.

“이렇게 진행하면 문제가 생겨도 대응할 시간이 있겠네요. 좋습니다.”

준호가 설명을 마치자 팀장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민호는 조용히 자료를 정리했다. 이번에도 칭찬은 준호에게 돌아갔다. 예전 같으면 자신이 한 역할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준호가 실제로 업무를 개선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려 했다.

물론 아쉬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경험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랐다. 승진에서 탈락한 뒤 자신이 무엇을 더 증명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답답함도 남아 있었다.

다만 후배가 잘하는 모습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해서 자신의 경력이 다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민호는 언젠가 팀장에게 자신의 역할과 앞으로의 기회에 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알아주기를 기다리기보다, 자신이 맡고 싶은 일과 필요한 조건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민호는 태성당구장으로 향했다.

당구장에 들어서니 재식과 성철이 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민호는 인사를 건넨 뒤 빈 당구대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오늘은 공을 치기 전에 잠깐씩 멈추는 연습을 해 보기로 했다.

수구와 제1적구, 제2적구의 위치를 확인하고 가능한 경로를 정했다. 타격한 뒤에는 수구가 어디에 멈췄는지 살폈다. 예상과 다르면 이유를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배치를 만들었다.

처음 몇 차례는 괜찮았다. 하지만 연습이 길어지자 공이 잘 맞지 않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타격은 비슷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수구가 지나치게 길게 움직이기도 했고, 반대로 예상보다 짧게 멈추기도 했다.

민호는 큐를 내려놓았다.

‘도대체 어디가 달라지는 걸까?’

당구는 생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경로를 이해하는 것과 그 경로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달랐다. 민호는 그 차이를 몸으로 배우는 중이었다.

그때 재식과 성철의 경기가 끝났다.

재식이 민호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혼자 연습하시는군요.”

“네. 공을 치고 나서 결과를 확인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너무 결과만 확인하다 보면 타격할 때 몸이 굳을 수도 있어요.”

민호는 큐를 바라봤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치기 전에는 충분히 생각하고, 치기로 결정했으면 그때는 타격에 집중해야죠. 공이 지나간 뒤에 다시 분석하고요. 타격하는 순간에도 계속 생각하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공을 치는 순간에도 두께가 맞는지, 속도가 적당한지, 수구가 어디로 갈지 계속 생각했다. 정확하게 치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동작이 부자연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말은 쉬운데 막상 하려면 어렵네요.”

“그렇죠. 저도 아직 어렵습니다.”

재식은 웃으며 큐를 들었다.

“한 게임 하시겠습니까?”

민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당구대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뱅킹으로 초구를 정했다. 재식이 먼저 초구를 치게 됐다.

재식은 배치를 확인하고 초구를 쳤다. 득점에 성공한 뒤 수구가 멈춘 위치를 살폈다. 이어진 공은 조금 까다로웠지만, 재식은 서두르지 않고 경로를 선택했다.

민호는 상대의 경기를 보면서도 점수판만 확인하지 않으려 했다. 재식이 어떤 공을 선택하는지,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살펴보았다.

재식은 몇 차례 득점에 성공했지만, 중간에 실수도 했다. 수구가 예상보다 짧게 움직여 제2적구를 맞히지 못한 것이다.

민호는 그 순간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제 따라잡을 수 있겠는데.’

그는 당구대 앞으로 걸어갔다. 공의 배치는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득점할 수 있는 경로가 보였다.

민호는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재식이 다음에도 실수하기를 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좋은 공을 치는 것보다 상대가 계속 실수하면 경기가 쉬워질 것 같았다.

그 생각을 알아차린 순간, 민호는 조금 불편해졌다.

상대가 실수하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다. 경기에서는 누구나 상대가 점수를 내지 못하기를 바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기대가 자신의 준비를 대신하기 시작할 때였다.

재식이 실수했다고 해서 자신이 저절로 득점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실패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공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면 기회는 그대로 사라질 수 있었다.

민호는 자세를 풀고 당구대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처음 생각했던 경로를 다시 확인했다. 타격하기 전에 충분히 판단하고, 실행할 때는 다른 생각을 끼워 넣지 않기로 했다.

큐가 움직였다.

수구는 제1적구를 맞힌 뒤 쿠션을 돌아 제2적구에 닿았다.

득점이었다.

민호는 잠시 공을 바라봤다. 재식이 실수했기 때문에 얻은 기회였지만, 그 기회를 살린 것은 자신의 타격이었다.

그는 다음 배치를 살폈다.

이번에는 득점 가능성이 조금 낮았다. 민호는 몇 가지 경로를 비교하다가 비교적 안정적인 선택을 했다. 하지만 수구의 속도를 정확하게 조절하지 못해 제2적구를 비켜 갔다.

실패였다.

민호는 아쉬움을 느꼈지만, 재식의 다음 실수를 기다리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놓친 공을 확인하고, 다음 차례에 무엇을 보완할지 생각했다.

경기는 계속됐다.

재식은 다시 점수를 쌓았고, 민호도 중간중간 득점에 성공했다. 점수 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민호는 재식의 실수가 나오면 기회를 살리려 했고, 재식이 연속으로 득점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다시 살폈다.

하지만 마음이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재식이 어려운 공을 성공시키자 민호는 순간적으로 감탄하면서도 부담을 느꼈다. 자신도 저 정도로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다음 샷에서 무리하게 어려운 경로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민호는 잠시 멈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재식처럼 보이는 공을 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공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그는 안정적인 경로를 선택했다. 득점에는 성공했지만, 수구가 다음 공을 치기 좋은 위치에 남지는 않았다.

민호는 공의 위치를 확인했다. 조금 아쉬웠지만, 적어도 자신이 왜 그 경로를 선택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재식의 차례가 돌아왔다. 재식은 남은 배치를 살폈다가 타격 직전에 자세를 풀었다. 다시 당구대 반대편으로 돌아가 경로를 확인한 뒤, 처음과 다른 선택을 했다.

그 샷은 성공했다.

민호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재식도 판단을 바꿀 때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처음 선택을 무조건 고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거나 처음 판단에 오류가 있었다면 바꿀 수 있었다. 다만 단순히 상대를 의식하거나 점수 차에 조급해져서 바꾸는 것은 경계해야 했다.

민호는 그 차이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경기는 재식의 승리로 끝났다.

민호는 아쉬웠지만, 지난번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여전히 실력이 부족했고 놓친 공도 많았다. 그러나 경기 중 자신이 어떤 순간에 흔들리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쳤습니다.”

재식이 먼저 말했다.

“오늘은 지난번보다 공을 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민호는 웃었다.

“생각은 정리하는데, 결과가 꼭 따라오지는 않네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한 대로 공이 움직여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재식은 큐를 정리하며 덧붙였다.

“그래도 생각 없이 치는 것과 생각한 뒤에 치는 건 다르죠. 당장 결과가 달라도, 나중에 무엇을 고쳐야 할지 알 수 있으니까요.”

민호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성철이 옆에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재식 씨는 상대가 실수할 때마다 기회를 잘 잡는 것 같아요.”

재식이 웃었다.

“저도 놓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상대가 실수하면 바로 득점으로 연결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성철의 말에 민호는 생각에 잠겼다.

재식은 상대가 실수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가 실수했을 때 자신에게 어떤 기회가 생겼는지 빠르게 판단하고, 그 기회를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민호는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상대의 실수를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실수가 나왔을 때 기회를 살리는 것은 준비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 그 준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태성이 다가와 물었다.

“오늘은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민호는 잠시 생각했다.

“상대가 실수하기를 바라는 것과, 상대가 실수했을 때 기회를 살리는 건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떤 점이 다르죠?”

“상대가 실수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기회를 살리려면 제 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니까요.”

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기다리는 시간에도 할 일이 있습니다. 상대를 지켜보는 것, 다음에 놓일 공을 예상하는 것,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무엇을 할지 준비하는 것. 가만히 서 있는 것과 준비하며 기다리는 건 다르니까요.”

민호는 그 말을 듣고 회사에서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는 승진에서 탈락한 뒤 자신이 인정받을 기회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 누군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고, 회사가 적절한 역할을 맡겨 주기를 기대했다.

그런 기대가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조직에서 자신의 성과를 평가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면서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재식이 실수하기를 기다린다고 자신의 실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공을 처리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로를 선택할지 경험을 쌓아야 했다.

민호는 자신이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기다렸고, 아들이 먼저 마음을 열기를 기다렸으며, 회사가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시하기를 기다렸다.

물론 먼저 다가가기 어려운 이유도 있었다. 자신이 먼저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고, 그동안 쌓아 온 자존심을 내려놓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있었다.

민호는 당구장을 나서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준호에게 업무 관련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 대신 팀장과 면담을 요청할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맡고 싶은 업무와 앞으로 필요한 역할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다. 당장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기다리는 것과 준비하는 것은 달랐다.

집에 도착한 민호는 수첩을 펼쳤다.

그는 오늘의 배움을 한 줄로 정리했다.

상대의 실수를 기다리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해낼 수 있도록 준비할 것.

그리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민호는 수첩을 덮었다.

당구 실력이 갑자기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재식과의 경기에서도 졌고, 성호와 다시 경기하면 또 다른 약점이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패배한 뒤에야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데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준비하는 것.

그것은 당구대 위에서뿐 아니라, 회사와 가족 사이에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민호는 다음 날 팀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기로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이번에는 누군가 먼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기만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당구대 위에서든 일상에서든,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알아보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