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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뱅킹

von 앙상블 · 2026-10-22

# 《퍼펙트큐》

## 제1부 무너진 큐

### 제1화. 뱅킹

강민호는 발표 자료의 마지막 장을 띄워 놓은 채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 27분.

회의 시작까지 3분이 남아 있었다. 회의실 긴 테이블에는 부서장들과 팀장들이 차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벽면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는 올해 하반기 신규 사업 추진 계획이라는 제목이 떠 있었다.

민호는 출력해 온 자료의 모서리를 가지런히 맞췄다. 밤새 몇 번이나 고친 자료였다. 숫자 하나를 수정하면 그 숫자와 연결된 표를 다시 확인했고, 표를 고치면 발표 문장까지 손봤다.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를 최대한 반영하다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는 올해 승진 대상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번에는 승진해야 할 사람이었다.

입사한 지 스물여덟 해. 남들보다 특별히 빠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뒤처진 적도 없었다.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졌고, 실적이 좋으면 조직의 성과라고 생각했다.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기보다 자신이 해결할 방법부터 찾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회사에서 그런 태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성과를 내는 사람과 성과를 인정받는 사람은 다를 수 있었다. 묵묵히 일하는 사람과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도 달랐다.

민호는 그 차이를 알면서도 바꾸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바꿀 필요가 없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부장님, 자료 최종본입니다.”

후배 박준호가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 서른여덟 살인 준호는 입사한 지 십 년이 조금 넘었다. 일 처리가 빠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능했다. 윗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감각도 있었다.

“최종본? 어제 저녁에 보낸 거랑 달라?”

“네. 대표님께서 아침에 말씀하신 내용을 반영했습니다. 발표 순서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민호가 준호를 바라보았다.

“발표 순서가 바뀌었다고?”

“네. 제가 먼저 사업 개요를 설명하고, 부장님께서 현장 운영 계획을 말씀하시는 걸로요.”

“그 얘기는 누가 했어?”

“기획팀장님이요. 전체 흐름상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준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민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준비한 발표는 사업의 필요성과 예상 수익만을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기존 사업에서 발생한 문제를 분석하고, 새로운 사업이 실제로 운영될 때 생길 수 있는 위험까지 짚어 놓았다. 그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자신이 처음부터 발표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순서는 바뀌어 있었다.

“알았어. 자료나 확인하자.”

민호는 더 묻지 않았다.

준호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 앞쪽으로 걸어갔다. 민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료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고 준호에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준호가 자신의 발표 기회를 빼앗은 것도 아니고, 회사가 정한 순서에 따르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자신이 왜 이런 일에 신경을 쓰는가 하는 것이었다.

민호는 종이 위의 숫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숫자는 적어도 말없이 자리를 바꾸지는 않았다.

오전 9시 30분, 회의가 시작되었다.

기획팀장이 회의 목적을 설명한 뒤 준호를 소개했다. 준호는 준비한 자료를 화면에 띄우고 신규 사업의 시장 규모와 예상 매출, 투자 회수 기간을 차례로 설명했다. 목소리는 또렷했고 문장은 짧았다. 질문이 나오면 곧바로 답했다.

민호는 팔짱을 끼지 않은 채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들었다.

준호의 설명은 매끄러웠다. 다만 현장 운영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한 장의 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인력 배치와 협력업체 선정, 일정 지연에 대한 대응책은 간단한 문장으로 넘어갔다.

민호가 자료를 만들면서 가장 오래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예상 매출은 계획대로 움직이면 나오는 숫자였다. 그러나 현장은 계획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협력업체의 사정으로 일정이 미뤄질 수도 있었고, 인력 수급이 늦어질 수도 있었다. 초기 비용을 줄이겠다고 인력을 지나치게 압축하면 오히려 사업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었다.

“현장 운영 계획은 강 부장님께서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기획팀장의 말에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준비한 첫 장을 띄웠다.

“앞서 설명한 매출 계획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그 수치를 달성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민호는 화면의 표를 가리켰다.

“첫째, 협력업체 선정이 늦어질 경우를 대비해 대체 업체를 사전에 확보해야 합니다. 둘째, 초기 인력을 최소 규모로 운영하더라도 현장 점검 인력까지 줄여서는 안 됩니다. 셋째, 사업 개시 후 한 달 동안은 매출보다 운영 안정성을 우선 평가해야 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렇게 하면 초기 비용이 늘어나는 것 아닙니까?”

한 임원이 물었다.

“일부 늘어납니다. 하지만 일정이 지연되거나 재작업이 발생하면 그 비용보다 손실이 커질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사업은 시작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후 계약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민호는 예상 비용과 위험 요소를 비교한 자료를 보여 주었다. 설명은 길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왜 그 대책이 필요한지, 비용을 얼마나 더 들여야 하는지 순서대로 정리했다.

발표가 끝나자 사업 담당 임원이 물었다.

“강 부장님 말씀대로라면 초기 운영을 안정시키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다만 전체 일정을 늦추자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할 여유를 확보하자는 겁니다.”

“좋습니다. 그 부분은 실행 계획에 반영해 보세요.”

민호는 고개를 숙였다.

회의가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의 발표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준비한 내용은 충분히 전달했다. 몇몇 임원은 자료를 다시 확인했고, 실행 계획에 반영하라는 지시도 나왔다.

그러나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기획팀장이 준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박 과장, 오늘 발표 좋았어. 자료가 한눈에 들어오더군.”

“감사합니다.”

“다음 보고도 자네가 중심을 잡아 봐.”

민호는 그 말을 들으며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자신에게는 실행 계획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준호에게는 다음 보고를 맡아 보라는 말이 주어졌다.

누가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기회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민호는 인사팀으로부터 짧은 연락을 받았다.

인사팀장은 그를 작은 면담실로 불렀다. 테이블 위에는 승진 심사 결과가 적힌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강 부장님, 이번에는 아쉽게 됐습니다.”

민호는 서류를 보지 않은 채 물었다.

“이번에도입니까?”

인사팀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

“업무 능력이나 책임감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심사에서는 조직을 이끄는 역량과 향후 역할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부족했습니까?”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입니다.”

민호는 그 대답을 예상했다. 회사에서 승진 탈락의 이유는 대개 명확한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조직 기여도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을 얼마나 바꾸면 다음에는 승진할 수 있는지 알려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제가 앞으로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하는지라도 알려 주십시오.”

“강 부장님은 실무 역량이 충분하십니다. 이번에 신규 사업도 맡으시게 될 테니, 그 과정에서 좋은 성과를 보여 주시면 다음 기회가 있을 겁니다.”

민호는 그제야 테이블 위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승진 심사 결과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신규 사업 책임자.

그 말이 축하인지, 위로인지, 아니면 승진에서 밀린 사람에게 주는 또 하나의 업무인지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담실을 나와 복도를 걸으면서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화를 내야 할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인사팀장이 결정한 것도 아니었고, 준호가 자신을 밀어낸 것도 아니었다.

그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회사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있다는 것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아들 현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아빠, 이번 주말에 시간 돼?

민호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현우는 요즘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들쭉날쭉했다. 취업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정확히 무엇을 준비하는지, 어디까지 진행했는지 물을 때마다 대화는 짧게 끝났다.

민호는 답장을 썼다.

무슨 일인데?

잠시 뒤 답이 왔다.

그냥 얘기 좀 하려고.

민호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냥 얘기 좀 하려고.

언제부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하려면 따로 시간을 잡아야 했을까. 예전에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친구와 다툰 일도 먼저 이야기하곤 했다. 자신이 바빠도 현우는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그때 민호는 늘 바빴다.

조금 있다가. 이 일만 끝내고. 다음에 이야기하자.

그렇게 미뤄 둔 대화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민호는 답장을 보냈다.

그래. 주말에 보자.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자마자 회사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신규 사업 관련 자료를 다음 날 오전까지 검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짧게 답했다.

확인하겠습니다.

퇴근길 지하철은 붐볐다. 민호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쉰셋.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였고, 앞으로도 몇 년은 회사에서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모든 것이 조금씩 늦어진 기분이었다.

승진도, 가족과의 대화도, 자신이 바라던 삶도.

집으로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지하철역을 나와 걷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골목으로 발길이 향했다. 큰길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곳에 당구장 간판이 보였다.

민호는 걸음을 멈췄다.

유리문 안쪽으로 초록색 당구대가 보였다. 한 남자가 몸을 낮추고 공을 겨누고 있었다. 큐를 쥔 손은 편안했고, 다른 손은 당구대 위에 단단한 브리지를 만들고 있었다.

남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큐 끝이 공에 닿는 순간, 흰 공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두 공이 부딪치는 소리가 짧게 울렸고, 한쪽 공이 쿠션 가까이에 멈췄다.

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회사에서는 발표 순서가 바뀌었고, 자신이 준비한 계획은 다른 사람의 발표 뒤에 놓였다. 승진 심사 결과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자료를 다시 고치고 설명을 보태도 오늘의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구대 위의 공은 달랐다.

공이 멈춘 위치에 따라 다음 선택이 달라졌다. 잘못 치면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다음 공을 어떻게 풀어 갈지 다시 판단해야 했다.

민호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당구를 제대로 쳐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때 당구장 안에서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건 너무 서둘렀지. 한 번만 더 생각하고 쳤어야지.”

공을 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눈앞에 있는 것만 봤네요.”

민호는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눈앞에 있는 것만 봤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는 당구장 문 앞까지 다가갔다가 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멈췄다. 오늘은 그냥 집에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들에게 연락도 해야 했고, 내일 제출할 자료도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돌아서려던 순간,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들어오실 겁니까?”

문을 연 남자가 물었다. 쉰 살 안팎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편안한 티셔츠 차림에 손에는 초크가 들려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구경만 하셔도 됩니다. 당구는 구경하다가 시작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남자는 특별히 권하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그저 문을 열어 둔 채 민호가 결정하기를 기다렸다.

민호는 안쪽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당구대, 조용한 조명, 공이 부딪치는 소리. 그곳에는 오늘 자신이 겪은 일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승진 심사 결과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초보자도 칠 수 있습니까?”

남자가 웃었다.

“당연하죠. 처음부터 잘 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민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아직 몰랐다.

오늘 자신이 잃었다고 생각한 것이 승진 기회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 이 당구대 앞에서 수없이 많은 공을 잘못 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 배우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저 하루가 끝나기 전에 잠깐 다른 곳에 들러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당구장 안쪽에서 남자가 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처음이시면 가볍게 잡아 보세요. 힘부터 주면 공이 생각대로 안 갑니다.”

민호는 큐를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길고 묵직했다.

그는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가 남자의 말을 떠올리고 손가락에 들어간 힘을 조금 풀었다.

“저는 태성입니다. 여기 당구장 주인이에요.”

“강민호입니다.”

“그럼 강 선생님, 오늘은 공을 맞히는 것부터 해 봅시다.”

민호는 당구대 앞에 섰다. 흰 공은 당구대 한가운데서 조금 오른쪽으로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그는 큐를 뻗어 공을 겨누었다.

그런데 막상 치려니 어디를 맞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디를 맞히면 됩니까?”

태성은 공의 위치를 확인한 뒤 말했다.

“일단 가운데를 향해 부드럽게 쳐 보세요. 세게 치는 것보다 큐를 똑바로 보내는 게 먼저입니다.”

민호는 숨을 들이마셨다. 큐를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밀었다.

탁.

흰 공이 굴러갔다. 목표로 삼았던 공을 비껴 지나 당구대 끝의 쿠션에 부딪혔다.

민호는 멋쩍게 웃었다.

“생각보다 어렵네요.”

“생각이 많으면 더 어렵습니다. 일단 한 번 더 해 보세요.”

민호는 큐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회사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여기서는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아직 알지 못했다.

그는 큐를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손에 힘을 조금 덜 주었다.

흰 공이 천천히 굴러갔다.

아직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승진 결과도, 아들과의 대화도, 내일의 업무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민호는 그날 처음으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구대 위에서 공 하나가 멈췄다.

민호의 새로운 경기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